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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이 묻는다 : 나는 누구입니까?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건’ 토론회 ①
피해생존자들의 증언
 
등록일 [ 2017년06월27일 20시59분 ]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가 지은 ‘살아남은 아이’ 출간을 계기로 형제복지원 참상이 알려지면서 2013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대책위는 ‘형제복지원은 단순히 사회복지시설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문제가 아니라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한 국가폭력이었다’며 정부에 진상규명 등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19대 국회(2014년)에선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등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아래 형제복지원특별법, 진선미의원 등 55명 공동발의)’이 발의되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이 법은 20대 국회에서 재발의 됐다.
 

박정희 정권 때 벌어진 문제가 박근혜 정부에서 해결될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었을까. 그럼에도 공중파 보도 등으로 일반 시민들도 많이 알았으니 자꾸 희망을 걸게 되었다. 피해생존자들은 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삭발을 하고 단식을 했다.


올해 초, 박근혜 정부가 무너지고 ‘인권’을 앞세운 새 정부가 출범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4년 형제복지원 피해자 증언대회에 참석해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과 피해 실태들이 낱낱이 파헤쳐지고, 당시에 고통받은 사람들이 제대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당시 형제복지원특별법 발의에도 참여했다. 피해생존자들은 그 약속을 기억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 정부는 어떻게 응답할까. 이제 실천만이 남았다. 희망고문이 너무 길었다.


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건’ 토론회가 열렸다. 1부에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이, 2부에선 형제복지원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짚어보는 시간이 진행됐다. 비마이너는 이날의 토론회를 1, 2부로 나눠 싣는다.


1부 글에선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엮었다. 이 목소리를 무얼 말하는가. 우리는, 국가는 이 목소리를 들을 귀를 가졌는가. 


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건’ 토론회가 열렸다. 1부에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이, 2부에선 형제복지원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짚어보는 시간이 진행됐다. 증언을 하는 박순이 씨(왼쪽에서 두번째).
# 형제복지원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내 수형 번호가 나오겠죠.
그럼 나도, 내 자녀도 부랑아가 돼요


저는 원숭이가 아니라서 이런 스포트라이트 받는 게 정말 싫은데. 형제복지원 안 들어갔더라면 이런 스포트라이트 받을 필요가 없어요. 저뿐만 아니라 생존자들 모두 트라우마를 엄청 심하게 겪고 있어요. 
 
저는 방에서 잠을 못 자요. 밖에서 누군가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벽을 보고 잠을 못 자요. 누군가 뒤에서 덮칠 것 같아서. 우리 아이들 학교 가면 24시간이 불안해요. 박인근(형제복지원 원장)이가 잡아갈까 봐. 저는 경상도 사람을 정말 싫어해요. 형제복지원에서 잡아갈까 봐. 길을 다니면 늘 뒤를 봐요. 누가 덮칠까 봐. 차를 타면 차 남바를 꼭 기억해야 해요. 여자들은 마트에 가면 쇼핑을 하죠. 저는 제가 살 물건만 딱 사고 나와요. 주위 사람이 쳐다보면 ‘저 사람이 내가 형제복지원에 있었다는 거 알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결혼도 안 하려고 했어요. 안 하려고 했는데, 저희 아저씨가 결혼하자고 해서 17년 전에 처음 이야기했어요. 난 형제복지원에 있었다. 이게 언제 수면 위에 떠오를지 모른다. 그때 내 수형 번호가 나오면 난 부랑아가 된다. 내 자녀도 부랑아가 된다. 그런데 아저씨가 그거 감안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3년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 보고 6개월 있다가 술 먹고 한종선 대표한테 그랬어요. 너가 알리지 않았더라면 수면 아래 감춰져 있을 것을 너 때문에 수면 위에 드러났다. 너 때문에 우리가 다시 트라우마를 꺼내서 그 고통을 다시 당하고 있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엄청 원망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누군가는 해야 하니깐, 제2의 인권피해를 막기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3년째 활동하고 있어요.


피해생존자들이 트라우마가 심해요. 일주일에 삼사일 술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자요. 저도 마찬가지고. 이건 보상받거나 사과받는다고 해서 절대 지워지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할 짐이기 때문에. 그래도 피해생존자들이 눈 감을 때 조금이라도 편히 감을 수 있도록, 우린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수형 번호를 제일 먼저 없애고 싶어요.

첫째로 사과가 제일 중요해요. 10살에 잡혀가서 16살 때 나왔어요. 제가 지금도 꿈이 있다면 학교에 다니는 거예요. “박순이” 하면 “네!” 하고. 여기 앞에 계신 분들은 편히 자랐죠. 그게 행복하다고 봐요. / 박순이 (80년대 초반~86년 퇴소)


# 두들겨 맞은 핏자국, 그걸 치우는 게 내 일이었습니다


제 이름은 이채식인데 정확한 제 이름은 아닌 것 같아요. 제 생일도 69년 4월 5일이 아닙니다. 아마 입양된 날이 그래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파양입니다. 키우기 싫으니까 관내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 형제복지원에 수용됐습니다. 
 
이채식 씨
희한하게 전 의무실에서 근무했고요. 지식이 있어 의무실에서 근무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거기서 근무했습니다. 사람이 다쳐서 오면 치료하는 일을 하는데 해박한 지식이 있어 소독하고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과산화수소 같은 거 발라주고. 찢겨서 오면 거기다가도 발라주고. 제가 한 건 그게 다였어요. 입에서 거품 나온다던가 죽기 일보 직전 되어야 외부병원 보내지 어지간하면 형제원에서 다 치료합니다. 찢어지면 핀셋 들고 가위 들고 그냥 꿰맵니다. 마취 그런 거 없습니다. 의무실에 좋은 약도 있었습니다. ‘삐콤’같은 영양제 같은 게 있었는데 그건 원장, 총무, 중대장 같은 분들이 맞아요.
 

선도실 소지(심부름꾼)도 했어요. 피해생존자들에겐 선도실이라는 말 자체가 공포의 대상입니다. 걸어서 들어갔다가 기어서 나오는 곳입니다. 두들겨 맞은 핏자국, 하루에 몇 명씩 걸려서 오는데 그걸 치우는 게 내 일이었습니다. 85년도부터 폐쇄될 때까지는 중대장실 소지를 했습니다. 그냥 중대장 소지한 게 아니라 저도 일반 소대에서 억수로 많이 두들겨 맞았습니다.
 

남들은 저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형님은 편하게 있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때 당시엔 내가 내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맨정신에서 그 많은 핏자국, 사람이 쓰러져 나가면 내가 다 치워야 하니깐. (침묵) 나는 분명히 제가 그곳에 있으면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봤고 심지어 애기들도 피부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것도 봤는데, 도대체가 사람들이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니가 어떻게 그런 걸 했겠노. 그곳에선 내가 그렇게 근무해야지만 내가 살아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재용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는데. 도망쳤다가 잡혀와서 맞아가지고 실려 나갔어요. 병원에서 치료받고 돌아와서 복지원 내 정신병원에 갔습니다. 맞아가지고 그렇게 됐단 말이지요.
 

많이 맞았고 많이 울고 또 내 나이에 안 봐야 할 것들을 봤기 때문에. …그때 그 모습. 맞은 사람이 저를 쳐다보던 눈빛. 자다가도 놀래서 일어납니다. 지금도 깜짝깜짝 놀래요. / 이채식 (82년 6월~87년 퇴소)


# 식판을 보면 겁이 나요. 형제복지원에선 식판에다가 밥을 먹었거든요


손정민 씨원래 고향은 진주입니다. 계모 구박이 너무 심했어요. 계모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산 친척집에 가려고 부산역에서 내려갔는데 밤 10인가, 사복형사들이 저를 잡아가더라구요. 9살인가 그랬을 겁니다. 부산중부경찰서에서 한 두시간 정도 앉혀놓더니 부산시청 사회복지과로 연락이 가더라구요. 거기서 절 형제복지원으로 보냈습니다.


밤 12시쯤인가, 옷을 싹 벗기고 사진 찍더니 신입소대로 보내더라구요. 거기는 정말 뭐라 그러지, 사람 사는 데가 아니에요. 원생들끼리 성폭력, 성추행, 강제노동이 너무 허다하게 있으니깐. 인권이라는 것 자체가 그 안에선 사치에요, 사치.


제가 들어온 81년도엔 형제원 건물이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할 때였어요. 한겨울에 여덟, 아홉, 열 살짜리가 마대자루에 흙 넣어서 산까지 수십번을 오르내리고 손에선 피가 질질질 흘러내리고. 그 안에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5년을 살았어요.
 

85년도에 작은아버지가 데리러 오면서 귀가 조치됐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전국 고아원은 고아원, 안 가본 곳 없이 저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길거리에서 객사하셨어요.


사회 나와서도 트라우마가 심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길거리 다니다가 저를 잡아갈까 봐,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습니다. 배우지도 못했으니 떳떳한 일을 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대형 덤프트럭을 하고 있습니다. 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무섭냐면, 형제복지원에선 식판에다가 밥을 먹었기 때문에 식판만 보면 겁이 나서 밥을 못 먹어요. 공사 현장 가면 함바집에서 식판에다가 밥을 주는데 제가 그 트라우마가 있어서 밥을 못 먹습니다. / 손정민 (81년~85년)


#내 유년기는 아버지와 형제복지원이 빼앗아갔어요
 

이향직 씨아버지 구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은 일상이었고, 한겨울에 홀딱 벗겨서 팬티만 입혀놓고, 전깃줄로 손발을 공처럼 둥글게 꽁꽁 묶어서 골목길에서 구둣발로 차면서 시멘트 바닥을 굴린 적도 있어요. 10살 때부터 가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출하다 아버지한테 잡혀 들어가고, 또 가출하고… 중1때 아버지한테 잡혀서 부전시장 부전역전 파출소로 끌려갔어요. 밤에 형제복지원 차가 와서 나는 그 지옥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명절과 크리스마스 제외하곤 안 맞는 날이 없어요. 밥은 거의 굶다시피 하고. 아이들은 지네도 잡아 씹어 먹고, 새끼뱀 잡으면 며칠을 가지고 놀다가 뜯어 먹곤 해요. 큰뱀은 명찰로 머리 잘라서 먹어요. 쫀드기라고 시커먼 흙덩어리를 납작하게 썰어서 말려 먹기도 하고.
 

집으로 편지 백번은 보냈을 거예요. 가정방문이라고, 어느 날은 형제원 내 교회 전도사님이 절 데리고 나와서 집에 데려다줬는데 아버지가 욕만 엄청 해대고 다시 돌려보냈어요. 형제복지원 폐쇄될 때까지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 생사 확인도 안 했다는 걸 출소 며칠 전 제 서류 보고서 알았네요. 내 부모는 자식 생사 확인도 안 했는데 제 중학교 담임선생님은 3번이나 찾아왔어요.
 

미칠 것 같이 억울한 게 또 하나 있어요. 그 지옥에서 매일 죽을 고생 하면서 일해서 들어놓은 적금이 있어요. 3년간 개처럼 일한 돈이 15만 몇천 원. 몇 푼 안 되는 것도 억울한데, 그 돈을 아버지가 가져갔어요.
 

19년 전에 집사람 만나서 혼인신고하려고 했는데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더라구요. 실종신고했는데 기간 지나도 행불 상태여서 절차에 의해 동사무소에서 말소시켰데요. 알고 보니 아버지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려고 법적으로 부양의무자인 저를 실종신고 하고선 말소시킨 거였어요.
 

제 유소년기의 추억과 희망을 아버지와 형제복지원이 다 빼앗아갔어요.
 

지금은 경기도 일대 아파트에서 열리는 야시장에서 회오리감자를 팔아요. 장사하면서도 국가폭력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노란리본을 같이 나눠줘요. 주말엔 온 가족이 둘러앉아 노란리본을 만들어요. 페이스북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온라인 서명전을 진행하면서 세상에 알리고 있구요. 지난해 11월부터 2월 마지막 주까지 4개월간 주말마다 광화문역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전을 해서 8060명에게 서명도 받았어요. 형제복지원 생존자라는 사실을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한 건 3~4년 정도 됐어요.  / 이향직 (84년~87년 4월)

 

#걸어서 한 시간 거리를, 6년이 지나서야 돌아갔네요


형제복지원 건물에 시멘트, 철근 빼고는 전부 다 우리가 만든 겁니다. 형제복지원 도착하니 건물은 거의 없었고 한참 산을 깎아 집을 지을 때였어요. 어른들이 부산 시내에서 가져온 모래 자갈, 어른들이 시궁창에서 주워온 돌들 우리가 집 짓는데 자갈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전부 다 주워오고 깎고 했습니다. 우리가 겨울에 양말도 없이 고무신 신고 다 깼어요. 6년간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갈 때는 십 원짜리 하나 안 주고.

김상수 씨 
아버지는 저를 찾아서 전국 곳곳을 헤매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니 집에 가라, 하면 걸어서라도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주례동에서 구포 집까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됩니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안에서 있었던 40년 전 이야기를 끄집어서 말로 하자니 참 어렵습니다. 만약에 내 9살짜리 아이가 없어졌다면, 불법 시설에서 6~7년간 감금되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경찰관 한 사람이 와서 조사만 똑바로 했어도 우리가 6년간 갇혀있지 않았을 겁니다.
 

가족들한테도 말 못 하고 살았어요. 몇 년 전 TV에서 형제복지원 이야길 접하고는 큰 용기내서 이야기했습니다. 가족들이 울면서 절 안아줬어요.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날 가뒀는지, 이젠 그걸 알아야겠습니다.
 

제가요, 머리 이렇게 다 깎고 보면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박인근 원장, 지금이라도 제 눈앞에 있으면 꼭꼭 씹어먹고 싶습니다. 열 살 때 잡아가서 스무 살 때 내보내는데 우리가 밖에 나가서 무얼 어떻게 먹고 삽니까? 죄 안 짓고 지금 여기 국회의사당까지 온 것만 해도 우리들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 김상수 (78년경 입소)  

 

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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