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재순 장애인 노동자가 세상을 떠난 지 49일이 하루 지난 10일, 서울 고용노동청 앞에서 장애인 노동자들이 모여 고용노동부 장관의 책임을 촉구하며 49재를 맞아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삼헌 무용가가 서울 고용노동청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49재는 사람이 죽고 난 뒤에 7일마다 재를 올리면서 다음 세상에는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불교 의식입니다. 저는 김재순 동지가 지금 살았던 세상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남들 눈치 안 보고 ‘나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박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외협력실장)
장애인 노동자 김재순 씨가 세상을 떠난 지 49일, 서울 고용노동청 앞에서 장애인 노동자들이 모여 고용노동부 장관의 책임을 촉구하며 49재를 치렀다.
중증 지적장애인 김재순 씨는 지난 5월 22일, 홀로 합성수지 파쇄기에 올라가 폐기물을 제거하다 미끄러져 파쇄기에 빨려 들어가 ‘다발성 분쇄손상’으로 사망했다. 25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는 사고 당시 ‘2인 1조’ 작업이 지켜지지 않는 노동환경에서 비상 정지 리모컨 하나 없이 홀로 고위험 작업을 진행했다. 게다가 작업 전에는 사전 조사나 작업계획서도 없었고, 관리감독자가 유해위험 요인을 제거하는 의무도 준수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산재로 인한 사망이다.
이에 고인의 아버지는 광주 고용노동청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진상조사 결과발표를 촉구했다. 사업주인 조선우드는 ‘고인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가 죽었다’라며 책임을 부인했다. 고용노동청은 수사결과를 발표도 하지 않은 채 고인의 26번째 생일 이틀 전, 사업주의 공장 작업 중지를 해제했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49일이 지났다. 아버지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난 9일 가동 중인 조선우드 공장 진입로에 분향소를 옮겨 49재를 치렀다.
하루가 지난 10일, 오후 7시 서울 고용노동청 앞에서 고 김재순 장애·노동·인권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는 고인의 49재를 다시 한번 치렀다. 이날 모인 장애인 노동자들은 고인의 넋을 기리며, 조선우드의 사업주를 구속하고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책임을 촉구했다.
박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외협력실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그동안 고 김재순 씨처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다 숨진 장애인 노동자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노동환경마저 감내할 수밖에 없을 만큼 장애인의 노동시장 진입은 높기만 하다. 대책위는 “불과 6년 전에도 또 다른 노동자가 목재파쇄기에 빨려 들어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노동부는 단 한 차례도 관리·감독을 하지 않았다”라며 “중증 지적장애인인 고인은 고된 업무로 일을 그만뒀지만,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해 3개월 만에 다시 파쇄기 앞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현실의 벽을 짚었다.
박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외협력실장은 “고인은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고 싶었지만, 조선우드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자존심 구겨가며 들어온 이상 누가 시키지 않아도 뭐라도 더 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한 만회라도 하느라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까”라며 “고인뿐 아니라 이 땅의 장애인 노동자들은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써줘서 사업주에게 고마워해야 하고,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장애인의 노동 현실에 분노했다.
서기현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소장 또한 참담한 심정을 전하며 “처음 그의 죽음을 들었을 때 ‘또 장애인이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장애인은 일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고 가난해지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아서, 더 이상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울부짖었다.
이현정 나야 장애인인권교육센터 인권강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이처럼 냉혹한 노동시장에 더해 장애인에 대한 사업주의 몰이해는 장애인의 노동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에 지난 2018년 5월 29일부터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이 개정됨에 따라 모든 사업주는 1년에 한 번씩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지만, 조선우드와 같은 상시 근로자 50인 미만의 사업주에 대해서는 교육 자료를 단순히 배포하고 게시하는 경우에도 교육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장애인 노동자들은 소규모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쉽게 노출되지만, 오히려 소규모의 사업장에서는 장애인 인식개선의 기회조차 놓치고 있다.
이현정 나야 장애인인권교육센터 인권강사는 “왜 고인은 근로지원인 조차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홀로 해야 했는가, 파쇄기에 들어갔을 때의 그 고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사업주가 의무교육인 직장 내 장애인식개선교육을 받았더라면 고인에게 이런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보호 장치마저 장애인 고용에 해를 끼친다고 여겨질 만큼 장애인 노동권 인식은 매우 낮다. 김재순 씨의 사망 이후 유가족과 노동계가 광주시청에 제조업 분야에서 장애인의 안전 환경 전수조사를 요청했지만, 광주시청 측은 ‘조사를 하게 되면 사업주가 장애인 고용을 더욱 안 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은 “광주시청의 대답이 바로 장애인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 준다”라며 “장애인 노동자가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권리중심의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다”라고 강조하며, 장애인 노동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대책위는 김재순 씨의 사망에 대해 고용노동부 장관의 공식사과와 진상규명 및 조선우드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또한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 △중증장애인 일자리 보장 △장애인 노동환경 안전실태 전면조사 △근로지원인 제도 개선 및 예산확대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 △장애인고용촉진및직업재활법 전면개정 △최저임금법 제7조 삭제 등으로 장애인 노동권을 제고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결의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피켓에는 ‘권리중심의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보장하라’라고 적혀있다. 사진 이가연
결의대회가 끝난 뒤 한 참가자가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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