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장애인 시설 밖 생활, 녹록지 않지만 살 만해요
중증장애인 20대 최영은씨의 탈시설 자립기, “시설 나가면 성폭행당해!” 반대 뚫고 가정까지 꾸며
함께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법 배워
자립센터에서 장애인권익활동가로
“더 많은 시설 장애인 사회로 나왔으면”
서울시가 지난 10월25일 ‘장애인 자립생활 지원 5개년(2018~2022) 계획’을 발표했다.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첫 신설’ 등의 내용을 담은 이번 5개년 계획은 중증장애인들의 완전한 홀로서기 실현이 목표다. <서울&>은 이를 계기로 11월7일 탈시설 중증장애인인 최영은(27)씨를 동행 취재했다. 탈시설 문제는 서울시가 중앙정부보다 앞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정책화한 주요 이슈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지역 내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사는 장애인 3천여 명 중 600명을 5년 안에 시설에서 독립하게 하겠다’는 계획을 이미 2013년에 발표했다. 기사는 최영은씨의 동의를 받아 최씨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했다. 편집자
“영은아, 니가 이렇게 장애가 심하고 여성인데, 나가긴 어딜 나가? 장애인 시설에서 나가면 성폭행당해!”
11월7일 오전 11시, 도봉구 창동 주공2단지 집을 나설 때 다시 기억난 말입니다. 1995년에 들어가 20년간 생활했던 중증장애인 시설인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오랫동안 들었던 말이에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인 제가 “장애인 시설에서 나가 비장애인들과 섞여 살아가고 싶다”고 할 때면, 시설 관계자들은 늘 “밥 주고, 씻겨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데 왜 시설에서 나가려 하느냐”며 저를 달랬습니다. 그런데도 고집을 피우면 끝내는 ‘시설 밖 무서운 세상’을 얘기하면서 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2015년 3월 시설에서 나왔습니다. “안 된다”는 말을 들어도 끈질기게 시설 관계자들에게 나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날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집을 나설 때면 그때 일이 떠오릅니다. 아직도 집을 나서는 것은 저 같은 중증장애인에게는 매일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함께 살고 있는 이상우(33) 오빠와 함께 대학로에 있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까지 지하철을 타고 갑니다. 그곳에서 오후 1~5시에 하는 ‘직장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양성 중증장애인 맞춤 과정’(이하 맞춤 과정)을 들으려구요.
5살 때 음성 꽃동네 입구에서 발견된 저는 혼자서는 이동할 수도 없고, 식사도 할 수 없고, 말로 저의 의사를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더는 시설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신체적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천 명 이상이 함께 살아가는 그곳에서는 꼭 새벽 5시30분에 아침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누가 아침을 새벽 5시30분에 먹나요? 아침잠이 많은 저는 그게 정말 싫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런 수동적 생활이 쌓이면서 저는 점점 스스로 생각하는 법조차 잊게 되었습니다.
4년 전 받은 전동 휠체어가 보도블록의 틈들을 지날 때 생기는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창동 지하철역 개찰구로 들어섭니다. 창동역은 엘리베이터를 두 번 타야만 승강장에 들어서는데, 이것도 나쁜 경우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환승역 가운데 하나인 충무로역과 교대역은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없어, 대부분의 장애인이 시간이 더 걸리는 한참 돌아가는 노선을 선택하곤 합니다.
창동역에서 혜화역까지 4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쉽지 않았던 시설 밖 생활’을 되돌아봅니다. 저는 식사와 이동 등을 지원해주는 ‘활동보조 서비스’가 꼭 필요한데, 시설에서 나온 직후에는 월 활동보조 서비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보건복지부에서 주는 월 400시간의 활동보조 서비스 시간에 서울시로부터 추가로 100시간을 더 받아 이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상우 오빠 만난 건 시설 밖에서 경험한 가장 큰 변화”
탈시설 장애인들은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자립생활주택이나 체험홈에서 자립생활을 해본 뒤 점차 완전한 독립 생활로 나아갑니다. 저는 지방의 시설에서 서울로 나왔기에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장애인이 자립해 살 수 있는 디딤돌 같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사회복지법인 평원재단의 종로구 장애인 자립주택‘평원재’에서 자립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이게 사는 거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무엇이든 제가 고민하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혜화역에서 내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온 뒤 마르니에 공원 뒤편에 있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향합니다. 공원을 가로지르다 함께 가던 상우 오빠가 휠체어를 탄 채 이용할 수 있는 그네를 탑니다. 그네 위에서 오빠가 언제나처럼 밝게 웃습니다.
오빠는 시설 밖 생활에서 제가 경험한 가장 큰 변화이고 선택입니다. 오빠 역시 활동보조 서비스가 없으면 식사나 이동이 어려운 중증장애인입니다. 그도 비슷한 시기 음성 꽃동네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탈시설생활을 하는 장애인들의 정기모임에서 만났는데, 곧 오빠로부터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았습니다.
상우 오빠와 저는 점차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도 배워갔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서툴렀습니다. 장애인 시설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본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처음엔 사람들과 약속을 하고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가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점차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센터 건물에 도착한 우리는 4층 ‘맞춤 교육’ 강연장으로 이동합니다. 강연장에는 벌써 반가운 장애인 선후배들의 얼굴들로 가득합니다. 나야 장애인권교육센터에서 마련한 이번 교육은 내년에 할 ‘직장내 장애인 인권개선 교육’을 장애인과 비장애인 강사가 함께 짝을 이뤄 진행하기 위한 준비 교육입니다. 11월6~23일 진행되는 이번 교육을 마치면 저는 ‘직장내 장애인 인권개선 교육 강사’라는 새 이력 하나를 추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처럼 우리 두 사람은 하나씩 하나씩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2016년부터는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장애인 권익옹호활동가로 활동했습니다. 장애인의 권익 확대 필요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는 역할이에요. 2017년 2월15일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충정로 사옥 앞에서 열린 ‘사회보장 기본법의 즉각 개정 집회’ 등 각종 장애인 인권 보호를 위한 집회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날 제가 집회에서 한 발언이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날 저는 길거리 투쟁에 나서는 이유에 대해 “저 최영은은 사람답게 살고 싶은 인간일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말을 못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발언을 하느냐고요? AAC(대체의사소통기·Augmentative and Alterative Communication) 앱 덕입니다. 저는 할 얘기가 있으면 그것을 AAC에 손으로 입력합니다. 그리고 실행 버튼을 누르면 그 내용이 스마트폰 스피커를 통해 음성으로 전달됩니다.
11월3일도 저에겐 의미 있는 하루였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이 마로니에공원에서 연 ‘#2018노란들판의 꿈 #언제라도 놀러와요’행사에서 사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집회 기획자와 다른 사회자들과 상의해 제가 얘기할 부분을 정한 뒤 이를 모두 AAC로 입력했습니다. 그날의 제 사회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저와 상우 오빠는 지난 7월 정말 큰 결정을 했습니다. 도봉구 창동 주공2단지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커플’이 되었습니다. 서울시의 저소득장애인 전세임대 지원제도의 도움이 컸습니다. 전체 1억5천만원의 전세금 중 서울시가 낮은 이자로 1억원을 지원해줬습니다. 나머지 5천만원은 두 사람이 시설을 나온 뒤 모은 돈으로 마련했습니다. 오는 19일에는 신사동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결혼사진도 찍을 예정입니다.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장애인 부부를 위해 마련해준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요즘 저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됐습니다. 상우 오빠와 함께 아이를 갖는 것입니다.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까?’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울까?’ 여러 고민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제 아이는 어떤 경우에도 시설에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시설에서 나온 뒤 제 생활은 쉽지만은 않은 고민과 결정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 자신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오후 5시 교육을 마친 뒤 약간은 꾸무럭한 하늘을 보며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합니다. 머릿속엔 여전히 생각이 가득합니다. 아직도 시설에 있는 많은 장애인 생각입니다. 저는 그들도 저와 상우 오빠처럼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서울 곳곳에서 장애인 서울 시민과 비장애인 서울 시민이 어울려 살면서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서로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