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시설에 갇혀 사느니, 나와 살다 죽었으면”
[현장] 4월20일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 앞두고 광화문역사·서울시청 앞에서 ‘탈시설’ 농성하는 사람들
최근 서울 광화문역과 시청역 사이엔 농성장이 연이어 세워졌다.
전국 장애인권단체들이 꾸린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420공투단)은 지난 15일 광화문역사 안 농성을 4박5일 일정으로 다시 열었다. 지난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 중단했던 농성이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시청 후문 앞에서 서울시의 탈시설계획을 비판하며 지난 12일부터 무기한농성을 시작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임기 내 최초다.
‘장애인의 날’(4월20일)을 앞두고 농성장이 두 개나 늘어선 이유를 직접 찾아 물었다. 정다운·장소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를 지난 17일 광화문역 농성장 안에서 만났다. 이날 야간 당번을 맡은 전남지역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도 함께였다.
“몇 번 설명을 해 드렸는데, 기자님들이 이게 어렵게 느껴지시나 봐요.” 정다운 활동가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요점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농성장에 나온 이유와 맞닿아 있었다. ‘예산 확대가 어렵다’고 되뇌는 정부와 지자체처럼, 기자들도 장애인이 공동체에 섞여 살아가는 사회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 (왼쪽부터)손영선 신안군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지원센터 소장과 전남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창준 집행위원장, 장소라·정다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가 17일 저녁 광화문역 천막농성장 앞 홍남기 기재부장관 사진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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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홍남기 기재부장관 ‘집중수배’하는 이유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이들이 하는 운동엔 한 가지가 두드러진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집중 겨냥한다. 지난해 서울역 등에서 김동연 당시 기재부장관을 현상수배했고, 이번엔 홍남기 현 장관을 ‘긴급수배’ 중이다. “지난해 말에 홍 장관에게 축하 공문이랑 성명도 보냈어요. 지난달엔 기재부 앞 1박 농성도 했고요. 답은 없었어요.”
전장연이 각 부처와 협의해 올린 예산이 기재부만 가면 깎인다. “박근혜 정부 동안 1842일 이어온 농성을 중단했어요.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거주시설(3대 적폐)을 폐지하기로 약속했거든요. 장애인 관련 공적 서비스를 논의할 복지부·고용노동부·문화체육관광부·국토교통부와 민관협의체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불완전하게나마 협의 끝에 4개 부처가 총 2조 6303억원을 요구했는데, 기재부가 1/3가량인 8407억원을 삭감했다. 이는 OECD 최하위 장애인복지예산 비율이다. 평균 수준이 되려면 8조원으로 확대해야 한다.
정부는 지난해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며 시행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예산 확대 없이, 등급을 ‘점수제’로 바꾸었을 뿐이다. “기존엔 등급으로 받아 먹으라고 했다면, 이젠 점수대로 받아 먹으라는 소리죠. 오늘 5주기를 맞은 송국현씨는 당시 활동지원서비스 신청기준에 미달해 못 받았는데 지금도 못 받아요.” 송국현씨는 2014년 활동지원서비스가 없는 사이 화재로 숨졌다.
▲ 지난 17일 저녁 7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농성 현장인 광화문 해치마당에선 고 송국현씨의 5주기 추모제가 진행됐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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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부에서 오간 말 “절대로 전장연을 만나지 말라”
분명히 이전 정부와 차이는 있다. 공식 정부문건에 ‘탈시설’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정다운 활동가는 박근혜 정부 땐 실무자들이 ‘활동보조인 없는 사람들은 시설로 보내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다고도 했다. “탈시설을 권리로 인정한 건 문재인 정부의 분명한 성과죠. 지금 정부가 하는 말은 ‘예산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 예요. ‘착한 정부’랄까? 그러나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면에서, 장애를 시혜 대상으로 보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거죠.”
두 활동가는 최근 우연히 기재부 복지예산과 사무실에 전화했다가 과장과 통화했는데, ‘전임 과장이 절대로 전장연을 만나지 말라는 충고를 남겼다’는 얘길 들었다며 웃었다. “왜 그랬는진 모르죠. 골치 아픈 애들이다, 귀찮은 존재다, 이런 거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새 과장님이 와서 이실직고를. 하하.”
“제 말이 어려운가요?” 단선적인 장애인권 보도
언론이 장애인권 현안을 보도하는 방식을 묻자 활동가들은 갸우뚱했다. “글쎄요. 보도 방식보다도, 아예 장애 관련 보도를 안 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는 것도 모르는 거 같아요. 지금 정부가 폐지를 하는지, 우리가 말하는 게 ‘진짜’ 폐지인지 ‘가짜’인지도 모르지 않을까요.” 두 활동가가 웃으며 말했다.
▲ 1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역사를 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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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은 대개 ‘직업재활시설’에서 일한다. 빵, 비누 등 단순반복 노동으로 만드는 물건이 ‘장애인이 만든 제품’이란 이름으로 팔린다. 유엔권리협약은 이같이 장애인들만 모아놓은 ‘보호작업장’이 사라져야 한다고 권고한다. 사회통합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일자리도 비장애인 기준으로 짜인 까닭이다.
“그런 눈으로 보면 ‘비장애인만큼 일 못하니 돈 조금만 받는 게 마땅해’ 보일 수밖에 없어요.” 정 활동가는 “장애인 당사자가 자기 경험을 활용해 다른 중증장애인을 지원하고, 권익 옹호나 인식 개선 활동을 하는 공공일자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최저임금도 준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소라 활동가는 현장의 다양한 사연들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현장 발언 들어보면 정말 많아요. 예컨대 ‘이동권’ 주제 하나로 기자회견을 하더라도 휠체어 타고 전시회에 가고 싶은 사람, 지하도 이용하고 싶은 사람, 지하철 이야기, 사람이 죽었단 이야기까지. 정말 다채로운 이야기들의 근본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해요.”
▲ 오종선 작가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의 설치미술작품인 대형 휠체어가 18일 서울 시청역 앞 지하도에 전시돼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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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 날, 서울시는 장애인들과 약속을 “잊어먹었다”
다음날 오후 찾은 시청 후문 앞 농성장. 이날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서울장차연)는 서울시 복지정책과와 만나 시의 탈시설 기본계획 수정을 요구할 예정이었다. 문애린 서울장차연 대표는 당일 맥빠지는 답을 들었다. “실무자들이 오늘 면담일정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농성은 8일째 이어지고 있다. 벽에는 “서울시의 계획은 장애인이 늙어죽은 후에나 가능한 계획” “45년 감옥 유지 계획” 등이 적힌 피켓이 붙었다. 하루 2~3개 단체가 릴레이로 농성을 잇는다. 18일 오후엔 이규식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과 그의 활동보조인, 김정하 장애와인권 발바닥행동 활동가를 비롯해 10여명이 천막을 꽉 채웠다.
▲ 지난 18일 오후 서울시청 후문 앞에 세워진 '서울시 탈시설계획 전면 수정 요구' 천막농성장을 활동가들이 지키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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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청 앞 천막농성장 부근 벽에 '서울시장애인인권증진계획은 장애인 나이들어 죽은 후에 가능한 계획' '감옥' '45년 기다릴 수 없다' 등 내용이 적힌 종이피켓이 붙어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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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에서 쭉 살다 죽기보다, 나와서 죽었으면 좋겠어요.” 이규식 소장 역시 19살부터 11년 간 경기도 양평 산속 거주시설에 살았다. 그리고 1999년 탈시설한 뒤 얼마후 장애인권 운동을 시작했다.
서울시는 ‘장애인의 지역사회 공동체 통합 추진’ 포부를 강조해왔지만, 최근 밝힌 탈시설 5개년 계획은 이전에 비해 목표가 절반으로 줄었다. 계획에 따라 1년에 60명씩 탈시설해도, 시 내 탈시설 과제를 완수하려면 45년이 걸린다.
“제가 살던 곳은 그나마 나았지만,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시설들이 산속에 떨어져 있어요. 거기서 사람이 맞기도 하고, 죽어 나오기도 해요. 그런데 박원순 시장은 처음엔 야심차게 탈시설 계획을 밝히더니, 이제는 10년 동안 500여명만 탈시설 하겠다고 하네요. 그동안 장애인들은 노인네 돼요. 그래서 농성하는 거예요.”
▲ 이규식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과 김정하 장애와인권 발바닥행동 활동가가 18일 서울시청 앞 농성장에서 말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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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에 대한 견해를 묻자 이규식 소장은 “자기 필요할 때만 오고. 집회하며 오라면 안 온다“고 답했다. “시설에서 사람이 죽거나, 아주 큰 사건이 나면 반짝 몰려들어요. 한 3~4일 갈까? 그러다 ‘쌩까고’. (웃음) 이후에 그 문제 해결하려고 집회하면 안 와요.” 이 소장은 장애인을 ‘불쌍하거나 대단하게’ 그리는 관행도 지적했다. “장애인을 취재원으로 보도할 때, 제발 평범한 사람 중 하나로 그렸으면 좋겠어요.”
김정하 활동가도 “기자들은 선정적인 사건사고가 있거나, 이렇게 장애인의 날 등 기념일에만 기자들이 찾아와 ‘뭐 없느냐’고 묻는다”고 꼬집었다. “그렇지만 심층보도할 여건도 조성됐다고 생각해요. 온라인 보도가 가능해지면서 분량과 형식의 제한도 줄어든 만큼, 전문가와 정책 이야기도 좋지만 당사자의 삶을 생생하고 깊이 있게 구술하는 보도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언론은 현장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