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활동가
전단지 뒷면에 쓰인 그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는 마포구 아현동 572-55호에 월세로 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세번의 강제집행으로 모두 뺏기고 쫓겨나 이 가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3일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거리에서 보내며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한 그는 12월4일 한강에서 발견되었다. 철거민 박준경. 서른일곱의 남자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당부는 이것이었다. “저는 이렇게 가더라도 어머니께는 임대아파트를 드려서 저와 같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그는 이 유서를 사람들이 잘 발견할 수 있도록 망원유수지의 정자에 놓아두었다.
유서에 쓰인 주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도 앱에 입력해보았다. 누군가 나에게 자신의 주소를 알려준다면 실은 굉장한 책임을 부여받는 일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가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박준경이 살았던 아현동 골목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아현역에서 1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거대한 살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때 2300여가구가 촘촘히 밥 냄새 풍기며 살았을 동네는 완전히 도륙당했다. 집집마다 문은 모조리 떼어졌고 바닥은 부서진 채 파헤쳐졌으며 창문은 안에서 밖으로 깨어져 파편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군데군데 똥오줌을 묻힌 이불이 악취를 풍기며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었다. 용역깡패들의 계산된 패악이었다.
박준경과 어머니는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5만원을 내며 살던 그들은 이곳을 떠날 여유가 없었다. 동네엔 그들 같은 가난한 세입자가 많았지만 그들을 위한 보상과 이주 대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30차례가 넘는 강제집행만이 이루어지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수십년을 뿌리내리며 살았던 집에서 도둑처럼 끌려나와 내동댕이쳐졌다. 9월, 살던 집에서 쫓겨난 두 사람은 헤어져서 철거지역의 빈집을 전전했다. 박준경은 전기도 물도 끊긴 집에서 3개월을 지냈다. 그리고 11월30일이 왔다.
서울시가 12월부터 2월까지 동절기 강제집행을 금지했으므로, 용역들은 11월30일에 쳐들어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배낭에 중요한 것들을 챙겨.” 그날 박준경은 마지막까지 버티다 끌려나왔다.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 추우니 찜질방에 가 있으라며 5만원을 주었다. “돈 떨어지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와.” 준경은 “용역들이 곧 들이닥칠지 모르니 어머니도 조심하시라” 일렀다. 두 사람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나눈 이 대화를 생각하면 나는 조금 울고 싶다. 준경은 4일 후 주검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게 힘이 되어야 했는데 짐만 되어 죄송하다’는 유서와 함께.
건물은 부수고 재건축하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한번 부수어지면 회복되기 어려운 존재라는 걸 그가 죽음으로 말하고 있다. ‘박준경의 길’을 따라 걸으며 ‘여기 사람이 있다’는 오랜 구호를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의 청춘과 삶을 느끼고 싶어 찾아간 길이었는데, 가난했던 청춘이 당한 처참한 모욕과 죽음만 보았다. ‘거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곳에, 사람이, 있었다. 박준경의 동료들과 어머니는 살인적인 개발과 강제집행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마포구청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 어떤 진정한 위로라도 모진 고문이라는 참척의 고통을 당한 어머니가 광장에 앉아 농성을 하는 겨울. 연대와 후원을 요청한다.(고 박준경열사 비상대책위원회, 국민은행 005701-04-155012(조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