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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똥칠할 때까지’ 의존하며 사는 삶의 가치
가치 없는 삶의 결정 : 장애학에서 바라본 ‘안락사’와 케어의 윤리②
 
등록일 [ 2018년11월23일 18시37분 ]
 
 

>> 1편 [ 안락사 금지와 자기결정권은 서로 충돌하는가 ] 이어서

 

-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에게 : 미래의 늙고 병든 ‘나’에 대한 후견주의적 개입은 정당한가

 

애드킨스 여사는 그녀가 죽겠다는 결정을 하였을 때 온전한 정신을 갖추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병의 말기에는 그와 같은 결정이 불가능하다. 말기 환자들은 다치는 것에 대해 지나친 공포감을 보이며 행동한다. 그들에게서 어떤 욕구를 읽어낸다면 그것은 죽겠다는 욕구가 아니라 살겠다는 욕구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정신이 그렇게 완전히 감퇴되었을 때 받게 될 치료를 규정해놓을 권한이 있을까? (…) 애드킨스 여사에게 그러한 권한이 인정된다면 그녀는 자신이 혐오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게 될 것임을 확신하며 남아있는 생을 즐길 수도 있었으리라.1)

 

드워킨의 책을 인용한 위 문장들 속에서, 알츠하이머 치매가 다가오고 있던 한 여성의 미래는 너무나 암울하게 그려진다. 지금은 비록 “온전한 정신”을 갖추고 있지만, 치매가 진행되면 곧 그녀는 저급한 “살겠다는 욕구”를 보일 것이리라. 드워킨의 글은 “정신이 그렇게 완전히 감퇴”한 상황에 대해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이라면 “혐오”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읽힌다.

 

이러한 경향은 드워킨이 ‘비판적 이익’에 큰 가치를 두는 시점부터 이미 잠재되어 있었다. 비판적 이익이란 어제, 오늘, 내일을 잇는 삶의 ‘저자(author)’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치매가 심해진 상태, 혹은 지체성 의식장애 상태에서는 드워킨이 추구하는 ‘저자’이기 힘들며, ‘비판적 이익’을 애초에 갖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따라서 드워킨은 우리의 직관에 맞는 ‘비판적 이익’이라는 개념을 도입함과 동시에, 미래에 도달할 장애에 대해 거부하고 ― (그리고 높은 확률로) 혐오하게 되어버리는 ― 필연적 귀결을 만들어냈다.2) ‘의식이 있는’ ‘성찰적인’ ‘높은 지능의’ 자기결정 가능한 자아를 전제하고 예찬함으로써, ‘의식이 없는’ ‘비-성찰적인’ ‘지능/인지장애의’ 자아를 배제하는 결과가 만들어진 것이다.

 

내 삶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비판적 인식에 기반한 ‘자기결정권’을 궁극적 가치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드워킨과 같아지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결정권을 거부할 수 있을까? 서두에서 언급한 자립생활운동의 긴 자기결정권 투쟁의 역사를, 드워킨과는 다른 방식으로 모순 없이 종합해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일본의 생존학 연구자 다테이와 신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드워킨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다테이와는 드워킨이 강력히 옹호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Advanced directive, 이하 AD)’3)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며,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결정한다는 것의 윤리성을 새롭게 질문해낸다.

 

내일의 나를 알고 있기에 오늘의 나의 대리인으로서 적절하다. 문제는 사전의 죽음 결정이 이런 경우와 같은 것인가이다. 지금 치매가 아닌 내가, 치매에 걸린 나를 상상하고, 그렇게 되면 죽기로 결정한다. 또한 지체성 의식장애가 되었을 경우를 상정해 (미리) 결정한다. 이것들과, 나를 알고 있는 내가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같은 것인가.
다를 것이다. 여기서 상상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나이며, 내가 모르는 상태이며, 지금까지의 나와 전혀 다른 나이다. 의식이 있는 상태의 내가, 의식이 없어진 자신이나 의식상태가 바뀐 자신을 상상하고 있다. 즉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나를 부정하고 있다. 현재의 나와 떼어내고 싶어 한다.
4)

 

저자는 드워킨의 ‘통합적 저자’의 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젊고/건강하고/장애가 없는 오늘의 ‘나’는, 너무나 다른 내일의 ‘나’ ― 즉, 병들고/아프고/장애를 지니고/늙은 내일의 ‘나’ ― 의 결정을 미리 내릴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즉, ‘비판적 이익’에 근거하여 병들고 장애를 지닌 내일의 나를 내 삶에서 깨끗이 도려낸 드워킨의 ‘저자’는, 실은 ‘어제의 나’이지 ‘내일의 나’가 아니다.

 

미래에 그 상태가 된 나의 일을, 그 이전의 내가 결정해도 좋은 것일까. 의식이 없어진 나에 대해 내가 결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혹은 현재와 아마도 크게 다른 상태가 된 나에 대해 내가 결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일을 결정하는 것일까. 특정 상태가 된 자신에 대해 가부장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그 사람은 오히려 결정의 시점에서, 그 시점에서의 내가, 장래에 상상되는 내가 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사전’에 결정하려고 하는 지금의 나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지, 그때 그렇게 되어 있는 나에게 있어 유리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사전에 결정하는 나와 그때의 나,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인가.
5)

 

저자는 “죽음을 판돈으로 해서, 현재의 스스로를 긍정”하고 있다는 강렬한 표현을 써가며 드워킨의 ‘비판적 주체’란 얼마나 장애차별적인가를 드러낸다. 다테이와의 주장에 따르면, 안락사란 결국 장애를 자신의 ‘저자성’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어제의 정상인’의 ‘내일의 장애인’에 대한 후견주의적 개입에 다름 아니다. 그 차별적 ‘정상인’은 단지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오는 장애를 “견딜 수 없었던” 것뿐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 속에서, 안락사 폐지에 대한 강한 비판이었던 ‘자기결정권’에 대한 ‘후견주의적 침해’라는 구도는, (미래의 ‘나’에 대한 현재의 ‘나’의) 후견주의적 개입과 (이른바 ‘그래도 죽으면 안 되지’라는 현재의 ‘나’에 대한 사회의) 후견주의적 개입 간의 비교로 새롭게 읽힌다.

 

1542968464_63639.jpg‘건강하고 장애가 없는 오늘의 나’가 ‘병들고 장애가 있는 내일의 나’에 대한 죽음을 결정한다는 것은 정당한가.

안락사를 결정하는 ‘자기결정권의 주체’가 실은 ‘아픈/장애 상태의 나’가 아닌, ‘건강한/비장애 상태 나’였음을 폭로함으로써, 안락사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결국 어떠한 ‘후견주의’를 전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결국 우리가 직면한 안락사라는 문제는, ‘자기결정권’ vs ‘후견주의적 개입’이라는 비교 불가한 가치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미래의 ‘나’에 대한 현재의 ‘나’의) 후견주의적 개입 vs (현재의 ‘나’에 대한 사회의) 후견주의적 개입이라는 비교될 수 있는 가치 사이의 선택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후견주의적 개입이 필요하다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후견주의일 것인가?’ 혹은 ‘어떤 의료적 개입이 필요한가’에 대해 논의하는 새로운 장이 열려야 한다. 우리는 장애학의 관점에서 어떤 개입을 용인하고 요청할 것인가? 보다 인권적인 개입은 무엇일 수 있을까? 먼 길을 돌아 다시 돌아온 곳은 결국 어떤 개입이 윤리적인가라는 ‘케어의 윤리(Ethics of Care)’6)라는 문제이다.

 

- 안락사에서 완화케어로 : 케어(Care)의 윤리①

 

앞서 우리는 안락사를 둘러싼 찬/반의 논리를 추적하며 두 입장 간의 팽팽한 긴장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난다. ‘존엄한 죽음’은 안락사를 하기/하지 않기로 양분되는 성질의 것일까?

 

안락사 찬/반 논쟁은 많은 경우 죽음을 하나의 순간으로 상정한다. 이처럼 죽음을 ‘선’이 아니라 ‘점’으로 보면, 안락사를 선택하거나 하지 않는 둘 중의 하나의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논의와는 달리, 죽음이란 죽는 ‘순간’뿐만이 아니라 ‘죽어감(dying)’이라는 ‘과정’을 동반한다. 죽음을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게 되면, 결국 ‘죽어감’7)의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 일지로 초점이 옮겨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의사조력자살이 도덕적 혹은 법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죽어가는 과정(dying process)에서 상황을 조절하기 원하는 것을 충족시킬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자명한 대답은 전문가적 완화케어(palliative care)에의 보편적으로 보장된 접근성(universal access)일 것이다. 의료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치료되지 않은 고통에 대해서는 의사조력자살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강한 도덕적 합의가 존재한다.
8)

 

과거 ‘호스피스’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완화케어의 흐름은, 호스피스가 ‘좋은 죽음’의 문제에 집중한 것에서 보다 나아가, ‘죽어가는/고통받는 과정’으로서의 삶 전체를 대상으로 확대되어 왔다. “죽어감(dying)을 하나의 ‘정상적’ 과정으로 생각”함으로써9), 단지 객관적 질병의 완치/생명 연장에 몰두하는 것이 아닌, 환자 개인과 그 가족의 맥락에 집중하여 통증의 경감/가족 상담/심리적·영적 돌봄(care)/사회경제적 돌봄으로 초점을 옮겨오자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순간이 아닌 과정이며, 따라서 존엄한 죽음에의 노력은 안락사 이외에도 너무나도 다양하다. 안락사는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긴 과정 속 사용가능한 수단의 일부분이며, 때로는 안락사 자체 또한 여러 실천의 합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테이와 신야는 안락사는 “살고 싶다면 살 수 있는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나서” 고민할 문제라고 비판한다.

 

환자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존엄사를 말하는 것은 순서가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살고 싶다면 살 수 있다는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나서, 죽는 것도 좋다고 말해야만 합니다.10)

 

이처럼 고통의 경감을 위한 통증 조절, 사회복지 서비스의 확충, 충분한 정서적/영적 지지체계 확보, 경제적 보험 적용 범위의 확대, 가족들의 부담경감 정책 등, 무수한 과제를 외면하고 우리는 ‘좋은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가 충분한 돌봄을 제공하지 않고, 안락사 대신 선택할 선택지를 마련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자율적’ 결정은 진정 ‘자율적’인 것일까. 안락사라는 힘든 선택을 하게 되는 이면에는, 고통받는 몸/아픈 몸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회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안락사를 논하기 전에 먼저, 죽어가는 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혐오하지 않을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다. 완화케어를 비롯한 사회적 노력을 통해 개인은 자신의 늙고/병들고/장애가 있는 몸으로도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인생의 마지막 단계 또한 가치 있을 수 있다는 신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병들고/늙고/장애가 생긴 미래의 자신의 상태가 ‘가치 없는 상태’로 여겨지지 않도록, 그 삶까지도 가치 있을 수 있도록 우리는 함께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는 것 _ 자유로운 개인에서 의존하는 개인으로 : 케어(Care)의 윤리②

 

완화의료를 통해 사회적 돌봄(care)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난 후,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마지막 문제가 있다. ‘돌봄받는 개인’, ‘의존하는 개인’으로 사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까. “벽에 똥칠하며 사는”, 주변에 민폐만 끼치고 사는 개인도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의존적 상태가 되기 전에, 나의 자율적 의사로 ‘깨끗한 죽음’을 선택하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인 것은 아닐까.11)

 

이러한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테이와는, ‘가치 있는 삶’의 결정의 근거가 되는 “자율적 주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비판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외부의 사물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에서만 모든 의미를 찾는 현대 서구 문명 자체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그 논의 구도의 기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에서 몇백 년 전에 시작한 근대사회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자기 주변 일을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여 컨트롤할 수 있는가에 비중을 두는 사회로, 그런 사회에서는 서서히 세계에 대해 자신의 컨트롤 능력이라는 것이 쇠약해지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단지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불편함을 넘어, 그들은 절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혹은 앞선 절망, 즉 이윽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절망이 밀려옵니다. 저는 그것이 적극적 안락사를 부르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생명윤리학 분야에서 유력하다고 여겨지는 논자들에게서, 주체의 자율, 자율적 주체에 대해 더 이상의 근거를 찾지 않는 매우 강한 신앙심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12)

 

1542968303_45045.jpg다테이와 신야 일본장애학회장
 

이처럼 ‘자율적 주체’가 가치 있는 삶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인간됨’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미국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에바 커테이는 인간됨은 주체의 자율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에게는 그 본질에서부터 “내재된 의존성(nested dependency)”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성은 바로 그 의존성을 둘러싼 관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의존이 생존 혹은 성장에 있어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한 사실이다. 영유아의 미성숙, 편의가 제공된 환경에서도 기능적으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과 병약자, 노쇠한 어르신의 허약함은 모두 피할 수 없는 의존의 예이다. (…) 생(生)과 사(死)를 생명(生命)이 붙어 있는 모든 유기체가 피할 수 없듯이, 인간의 의존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도덕적 감정과 애착 능력을 갖춘 인간을 위한 긴 발육 과정은, 의존인에 대한 돌봄을 인간성(humanity)의 표징으로 만들 수도 있다.13)


인간의 범주에서 밀려난 “똥칠하는 삶”을 변론하며, 커테이는 중증장애를 지닌 딸과의 경험 속에서 의존(dependency)이라는 요소를 인간성의 근본 요소로 놓는다. 그녀가 말하듯, 우리가 모두 “어느 엄마의 아이”인 이상, 우리는 서로 의지해 왔으며 앞으로도 의지할 것이다. 따라서 ‘자율적인 인간’이 아닌 ‘의존적인 인간’에서 인간의 본질은 출발하며, 서로 의존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왔다는 것이다.14)

 

따라서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인간이 되기 위해, 돌보아질 권리(right to be cared)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생존할 수 있도록 충분히 돌봐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의무(duty to care)가 있다. 케어란 곧 인간성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며, 보다 인간적 삶을/인간적 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케어의 공공윤리(public ethics of care)'를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질병이 없는/장애가 없는/젊고 건강한 몸, 의존하지 않는 자율이 ‘가치 있음’를 구성하는 이 시대에, ‘가치가 없기에’ 안락사의 대상에 놓이는 무수한 삶들이 있다. 우리는 그 늙고 병든, 장애를 가진 삶들 앞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식물상태’ 혹은 ‘중증 치매’가 되었을 때는 안락사로 생명을 중단하고 싶다”는 개인(혹은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위의 긴 논의의 끝에,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에 기대어 할 수 있는 말은 안락사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가 아니다. 그 몸을 떠나보내든 떠나보내지 않든, 다만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마지막까지 삶은 그 자체로 여전히 가치 있음을 말하고 증명하는 일이다.

 

의존하는 것이 무서운 그에게, 의존해도 괜찮다고, 의존하기에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하기.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존엄한 죽음의 과정을 위한 방법은 안락사만이 아니라고, 당신의 고통을 줄이고 보다 행복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다른 방법들을 사회가 함께 고민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실천하기.

 

이렇게 “우리는 당신을 도울 의무가, 당신은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가운데에, 죽음과 죽어감의 논의는 의학이나 장애학의 지평을 넘어 새로운 ‘인간적 사회’를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살아있는 것만으로 가치 있다’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 안락사로부터 시작한 긴 여정 끝에 다시 새롭게 들린다.

 

* 각주

1) 로널드 드워킨(2014), 앞의 책. p.284-285

2) 다테이와 신야는 이러한 드워킨의 결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OO인은 죽는 편이 좋다는 것과, 만약 내가 OO인이라면 나는 나에 한해서는 죽겠다고 말하는 것, 전자는 좋지 않지만 후자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나의 피부가 희다면 죽는 게 낫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런 피부색의 사람에 대한 충분한 모욕이 아닌가. 이러한 태도는 의견 표명의 자유라는 영역 안에 있는 것일까.” (다테이와 신야(2015), 정효운·배관문 역, 『좋은 죽음』, 청년사. p.143-145)

3) 사전연명의료의향서(Advanced Directives, AD)는 질병이나 장애가 생기기/진행되기 전에 미리 미래의 상태를 가정하고 그 때에 어떤 의료적 조치를 취할 것인지를 사전에 표명해 놓는 법적 문서이다. (그 도입의 맥락과 종류는 허대석[2018],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 글항아리, p.79-93 참조)

4) 다테이와 신야(2015), 앞의 책. p.133-134. 강조 필자.

5) 다테이와 신야(2015), 앞의 책. p.131, 136. 강조 필자. 맥락 이해를 위해 문장 간 순서를 다소 편집하였다.

6) 역자에 따라 ‘돌봄의 윤리’, ‘보살핌의 윤리’ 혹은 ‘배려의 윤리’로 번역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케어(Care)를 ‘돌봄’ 혹은 ‘의료’라 번역하는 순간 완화의료(Palliative care)', ‘커뮤니티 케어(Community care)’ 등의 개념과의 연관성이 모호해진다는 점에서 대부분 ‘케어’로 표기하고, 필요에 따라 ‘돌봄’ 등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7) 미국 호스피스 운동을 개척하고 ‘죽음학'이라는 분야를 연 퀴블러 로스의 저작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처럼, 죽음과 죽어감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다.

8) B.R. Rerrell et al (ed)(2010), 『Oxford textbook of Palliative nursing』, OUP. 3rd ed. p.1189. 강조 필자.

9) WHO definition of Palliative care (http://www.who.int/cancer/palliative/definition/en/)

10) 다테이와 신야(2015), 앞의 책. p.16-17

11) ‘깨끗한 죽음’, ‘존엄한 죽음’이라는 믿음은 드워킨이 말한 ‘주체적이고 성찰적인 개인’에 삶의 의미를 놓는 자유주의적 사고를 전제한다. 따라서 ‘나’를 성찰하는 것을 통해 ‘비판적 이익’을 취할 수 없는 개인은, 많은 경우 인간의 범주에서 밀려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해 김원영(2018)은 개인의 비판적 이익을 옹호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도 개인의 저자성(authorship)은 존중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장애인이 설사 “망상에 빠진 작가”라 할지라도, 그것은 일말의 맥락을 포함하는 자기서사이며, 자기서사에 위계는 있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서사가 불가능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는 ‘공저자(Co-author)’라는 개념을 통해 관계 속에서 저자성이 확보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관계’에 기반을 둔 저자성은 결국 커테이의 ‘의존적 자아’개념과 연관이 된다. (p.184-205) 그러나 사회적 관계가 옅은 사람의 경우에는 그 공저자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공저자라는 개념은 오히려 개인의 가치 원천을 그 주변 사람들에게 옮김으로써, 중증장애인 혼자서는 가치 있기 힘듦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저자’가 전제하고 있는 일말의 자기결정, 그마저도 불가한 지체성 의식장애 상태(이른바 ‘식물상태’)의 개인은 어떠한 저술이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다테이와는 ‘저자’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할 것을 요청하는 듯이 보인다.

12)『좋은 죽음』 p.8, p.35에서 각각 인용. 내용의 일관성을 위해 말투를 수정하였다.

13) 에바 페더 커테이(2016), 나상원·김희강 역, 『돌봄 : 사랑의 노동』, 박영사. p.81-82. 괄호 속 내용 및 강조는 필자 추가.

14) 장애학 연구활동가 김도현의 말처럼, “우리가 의식을 했든 의식을 하지 못했든, 자립/의존(independence/dependence)이라는 이분법은 정상/비정상(normality/abnormality)의 이분법과 일정한 동형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자립적 개인’을 넘어 서로 의존하고 연대하는 ‘연립(聯立, Inter-dependence)적 개인’을 추구해야 한다. (김도현(2012), 「정립에서 자립으로, 자립에서 다시 연립으로」, 진보평론. p.76)

 

 

유기훈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beminor@bemin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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