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활동가
11년 전 그날, 식당을 하던 인숙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가스 불을 댕겼을 때 삽시간에 화염이 치솟았다. 그 사고로 인숙은 전신 86퍼센트에 화상을 입었고, 다섯살 된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식당과 집을 모두 처분했지만 수술비를 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후원금을 받기 위해 인숙은 자신조차도 두려워서 한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티브이에 드러내야 했다. 퇴원 후 인숙은 친정으로 가 은둔의 삶을 살았다.
화상의 통증보다 인숙을 괴롭혔던 것은 온몸에 벌레처럼 달라붙는 사람들의 시선과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고통이었다. 남편의 마음이 떠나갔고 간병하던 식구들도 점점 지쳐갔다. 하나 남은 딸에게 밥도 못 해주는 엄마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을까. 모아두었던 수면제를 털어 먹었다. 그러나 생명력 강한 인숙의 몸이 먹은 약을 모두 게워냈다. 인숙은 그것을 ‘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돈 앞에는 가족도 없다는 절망감과 누구도 아이를 대신 키워주지 않을 거라는 절박함이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인숙은 항상 딸과 떨어져서 걸었다고 했다. 딸과 나란히 걷다 딸의 친구들과 마주친다면 딸에게 난처한 일이 생길지 몰랐기 때문이다. “제가 항상 뒤에서 걸었어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제 눈앞에 있어야 안심이 됐어요” 하고 인숙이 말했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가 딸을 지키기 위해 유지해야 했던 거리는 몇미터쯤 되었을까. 다리 아픈 엄마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피며 천천히 걸었을 인숙의 딸과 그런 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종종걸음을 쳤을 인숙 사이의 그 거리가 너무 애달파서 가슴이 시렸다.
스무살이 된 인숙의 딸은 간호대학에 들어갔다. 간호사가 국외 취업이 잘된다는 이야길 듣고 인숙이 권한 것이라고 했다. 고립된 삶을 살아온 인숙에게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삶의 끈이었던 딸을 굳이 국외에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아 이유를 물었다. “한국에선 딸이 살기 힘들 것 같아요. 결혼을 하려고 해도 시댁에서 싫어하겠죠. 자기 아들이 번 돈을 처가에 줘야 할까 봐 걱정하지 않을까요?” 아, 이것은 얼마나 한국적인 고통인가. 인숙은 이제 딸을 지키기 위해 바다만큼의 거리를 각오하고 있었다. 딸의 인생에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딸이 스무살이 되자 인숙이 받던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가 절반으로 줄었고, 딸이 알바를 해서 돈을 버니 인숙의 기초생활수급비가 삭감되었다. 인숙의 가난과 장애에 대한 부양 책임을 딸에게 넘기려는 정부의 지침이었다. 인숙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딸은 딸의 인생을 살게 해줘야 하잖아요.” 그것이 인숙이 살아야 할 이유였는데 어쩌면 자신이 딸의 인생에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화상 입은 인숙의 얼굴 위로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위험 속에 산다’. 위험하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어떤 위험은 명백히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바깥에 있다. 일어날 위험에 대한 대비와 일어난 사고에 대한 대책을 함께 마련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 아닌가. 나는 중화상 사고의 생존자들에게 ‘그만큼 살게 해준 것을 고마워하라’고 말하는 사회가 아니라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인숙도, 인숙의 딸도 사라지지 않는 사회,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스스럼없이 일상의 거리를 걷는 사회에 살고 싶다. 그것이 바로 안전의 증거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