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가… 강원도… 은혜원에선 추웠어… 추웠어…” “같이 방 쓰던 애가 바짝, 아니, 바아짝, 응, 바ㄹ짝이 있었는데, 무서워, 막 묶어놓고 때리고.”
<나, 함께 산다>는 시설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태반의 구술자가 언어장애가 있거나 지적장애가 있다는 사실은 이 기록의 진정 기록할 만한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 작업을 제안했다면 대번에 거절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각이 안 나오는 일’. 이 구술자들에게 가장 취약한 것이 언어능력, 그러니까 ‘이야기하기’이니까. 그것이 바로 그들의 장애니까 말이다.
기록자 서중원은 용감하게도(!) 이 제안을 기쁘게 수락한다. ‘살아 있음을 멋지게 항변하는 이들’을 만나다니! 그러나 동경심에 가득 차 그녀가 놓친 것이 있으니, 자신이 장애인을 거의 만나본 적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흔한 패키지여행 한번 가보지 않았던 사람의 ‘오지 탐험기’라고 할까.
그리하여 애초 1년을 염두에 두었던 여행이 2년을 넘겼던 까닭은 ‘여행 내내 자신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대 부서진 것 중 가장 낭패인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 그러니까 표준어의 체계 안에선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빨… 경찰서… 가서… 찾았어. 동생.” 상분씨는 기록자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자 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상분씨의 몸짓은 기록자의 말을 통해 드러난다. “치아… 아니, 치과기록을 가지고, 경찰서? 누구랑 갔는데? 활동가들이 도와서? 찾았어, 동생을?” 무수한 스무고개 끝에 얻은 정보들을 ‘번듯하고 매끄러운’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일, 기록자의 필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자는 상분씨의 입말 그대로 옮겼다. 상분씨를 어떤 매력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이야기의 ‘주체’로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설 나와 사니 뭐가 좋으냐는 질문에 상분씨가 대답한다. “추운 게 좋아. 정우(남편)가 안아줘. 따뜻해. 이불처럼.” 그러면서 연필로 꼭꼭 눌러쓴 시를 한편 보여준다. ‘<눈>. 이상분.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기록자는 상분씨의 시에 가슴 떨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어느 문예지에 기고했다가 한 독자로부터 이 시가 상분씨의 것이 아니라 윤동주의 것이라는 제보를 듣는다. “상분씨 마음이 시인의 마음과 같았을 거예요. 윤동주 시인도 좋아하셨을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둘 사이의 짐작과 오해 속에 새롭게 탄생한 이야기! 상분씨와 윤동주와 기록자와 독자가 함께 지어낸 이 이야기가 나는 눈물이 날 만큼 좋다.
그동안은 엄숙한 증언들만이 시설 밖으로 나왔다. 이제 시설 바깥으로 나오고 있는 말들은 이런 것들이다. 더듬는 말, 맥락을 알 수 없는 말, 뭉개지고 덩어리진 말, 까끌까끌한 말. ‘언어의 수용소’가 있다면 필시 갇히고야 말았을 ‘추하고 열등하고 쓸모없는’ 말들.
나는 어쩐지 어떤 견고했던 둑이 무너진 것 같은 해방감이 든다. 더 많은 짐작과 오해 속에 공동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함께 산다는 건 함께 이야기를 지어나가는 것이다. 돌아갈 길이 ‘부서져야’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지도 없이 떠난 그녀의 여행이 하나의 지도가 되었다. 부러워서 가슴이 조금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