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은 앓음이다
홍은전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보름 전 세상을 떠난 박종필 감독의 다큐 <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실직 노숙자 >를 보았다. 노숙인의 시선에서 본 세상은 충격적이었고 그것을 담은 다큐는 경이로웠다. 1998년 추석 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 뒤편, 한 남자가 불붙인 담배를 바닥에 세우려고 애쓰고 있다. 자꾸만 굴러가는 담배를 붙잡는 그는 자기 몸도 못 가눌 만큼 취해 있다. 담배 앞에서 두 번 절을 한 남자가 경계도 분노도 없이 카메라를 쳐다본다. 우물처럼 깊고 까만 눈에 슬픔과 비참이 가득 차 있다. “집에 왜 안 가고 싶겠냐고. 왜. 왜. 엄마도 보고, 아버지 산소도 매야 하는데.” 그의 눈빛을 견딜 수 없어 시선을 피하고 싶다.
‘두수형’은 고아원에 맡겨둔 두 아이를 만나고 온 뒤 수용시설에 들어가기로 했다. “열심히 해서 아이들 찾아올 거야.” 어두운 저녁,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그가 시설의 철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다음 장면. 두수형이 방금 들어갔던 철문 바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술 냄새가 난다며 쫓겨난 것이다. 일어설 힘조차 없어 보이는 두수형의 옆모습에 가슴이 저민다. 그런데, 이상하다. 저 장면, 어떻게 찍었을까. 두수형이 철문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박종필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는 뜻인가. 그리하여 나는 저 모든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을 박종필의 얼굴, 그날 밤의 서성임 같은 것을 생각한다.
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은 독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방식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 박종필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전자의 앎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박종필의 앎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전자의 앎이 폭넓음을 지향한다면 박종필의 앎은 정확함을 지향할 것이다. ‘위험’이 가장 본질적 요소인 그런 앎이 있다. 추석날 아침, “식사하셨어요?” 하고 묻자 ‘기태형’이 고개를 젓는다. 속에서 받질 않아 먹을 수가 없어, 라고 대답하면서도 그는 3500원짜리 된장찌개가 꼭 한번 먹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한 달 뒤면 내 생일이야. 그때까지만 살다가 죽으려고.”
그런 날이면 형들의 손을 잡고 병원에 가고 따뜻한 된장찌개를 사고 싶지 않았겠나. 그러나 박종필은 ‘카메라를 허락해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뻤을 것이고, 그 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골방에 처박혀 영상을 편집해야 했을 땐 애꿎은 카메라를 원망도 했겠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사랑했을 것이다. 살갑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그를 사람들 가운데로 들여보내주던 마술 같은 그것. 우리를 찍어줘. 그는 그 말이 진심으로 고마워 몸을 아끼지 않고 찍고 또 찍었을 것이다.
박종필의 앎은 앓음이었다. 그는 다큐를 찍어 명예를 얻었지만 우정을 나눈 형들은 객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부채감과 자괴감으로 크게 앓았다. 그 앓음이 박종필의 삶을 결정지을 만큼 대단했으리란 걸, 다큐를 보며 알았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장애, 빈민 현장의 영상활동가로 살았다. 오는 18일까지 유튜브에서 그의 다큐 세 편을 볼 수 있다. 당신이 그것을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박종필의 정신을 이어갈 다큐멘터리 제작 집단 ‘다큐인’에 대한 연대와 후원을 요청한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살고 싶다. 내가 발 디딘 현장에 애타게 곡진해지고 싶다. 그의 다큐를 본다면 당신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