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나는 척수장애인이라 계단을 기어갈 수조차 없다. 2층 투표소에 올라가 투표하고 싶으니 선관위는 그에 따른 편의를 제공하라”며 1층 계단 아래에서 요구하고 있다. 투표하러 온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 2층 투표소로 가고 있다.
사전투표 이틀째인 5일, 휠체어 탄 장애인 유권자가 투표를 하러 갔다. 투표소는 2층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결국 장애인은 계단을 기어 투표소로 올라갔고, 길 수조차 없는 또 다른 장애인은 계단 아래에서 “투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외쳤다.
장애인은 투표소에 대한 물리적 접근뿐만 아니라 투표 전 과정에서 차별받고 배제되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글 공보물은 마련되지 않고 있으며, TV 토론회에서 농인을 위한 수화언어(아래 수어)통역은 충분히 제공되지 않고 있다. 장애인거주시설, 정신병원 등에선 당사자 의지와 상관없이 거소투표가 이뤄지거나 아예 투표권 자체가 박탈당한다.
이 문제에 대해 장애계는 매 선거 때마다 모니터링을 하며 개선을 요구해왔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2017년 19대 대선 사전투표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이에 2017대선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대선장차연)는 매번 반복되는 문제를 더는 지켜볼 수 없다며 사전투표 이틀째인 5일 오후 2시, 삼청동 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요구했다.
2017대선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문제를 더는 지켜볼 수 없다며 사전투표 이틀째인 5일 오후 2시, 삼청동 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촉구했다.
이들에 따르면 대선 일정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 4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선관위)는 장애계 단체들과 만나 ‘제19대 대선 장애인유권자 정책간담회’를 진행했다. 그러나 간담회가 무색하게 사전투표소로 발표된 3516곳 중 장애인이 접근 불가한 곳이 644곳(18.3%)이나 되었다. 서울의 경우 424곳 중 160곳(37.7%)에 달해, 10곳 중 4곳은 장애인이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대선장차연은 사전투표 첫날인 4일,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장애인 참정권 실태를 접수받았다. 상황은 예상한 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휠체어 탄 장애인은 투표소가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지하 혹은 2, 3층에 설치되어 있어 결국 투표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또는 엘리베이터 없이 휠체어 리프트만 있어 이를 이용하려고 하니 전동휠체어는 무겁다고 거절당하기도 했다.
‘1층에 설치한 임시기표소에서 투표하라’는 선관위의 조치에 대한 불만도 쏟아졌다. 임시기표소에서 하는 경우, 선거참관인이 동행하긴 하나 유권자는 참관인이 가져다주는 투표용지에 도장만 찍을 뿐, 자신이 직접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을 수 없다. 또한, 참관인에게 자신의 신분증을 맡겨 신분 확인을 요청해야 한다.
삼청동 주민센터 1층에 있는 임시기표소.
휠체어 탄 장애인이 선거참관인으로 참여한 경우엔 휠체어째 탑승할 수 있는 차량이 없으니 투표함이 최종 이동하는 곳까지 함께 갈 수 없다고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다. 휠체어 탄 장애인을 제외한 비장애인 선거참관인들만 투표함 최종 이동장소까지 간 것이다.
농인도 투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수어통역사가 어느 투표소에 있는지 선관위 홈페이지에서도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의 경우엔 자신이 잘 기표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대해 대선장차연은 “장애인의 투표권을 보장하겠다는 간담회를 진행하고선 10곳 중 4곳을 장애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결정한 것은 장애인을 유권자로 인정한다고 보기 매우 어렵다”면서 “아무리 좋은 편의지원제도와 투표소, 기표소 환경을 만든다 할지라도 장애인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장애인의 투표권은 종잇조각과 마찬가지”라고 질타했다.
이들은 “장애인 유권자의 참정권 보장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형식적 지원에 그치는 선관위의 오래된 관행을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다”면서 “모든 사람의 정치에 대한 권리가 지켜질 수 있도록 중앙선관위는 장애인의 외침과 요구에 답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선장차연은 △모든 투표소에 장애인 접근성 확보 △투표과정에서의 모든 정당한 편의 제공 △선거사무원 등 관련자들의 장애인 지원에 대한 교육 강화 △모든 투표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직접 참여에 대한 권리 보장 △장애인 거주시설 내 장애인 참정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이날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는 전날 사전투표소장에서 겪었던 수모를 말하며 분노를 표했다.
“어제 강서구청에 사전투표를 하러 갔다. 그런데 본 투표장은 지하 3층에 있고 1층에 임시기표소가 있었다. 구청에 편의시설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하니 구청은 어디에 편의시설이 되어 있는지 몰라 선관위 통해 알아보는 데만 시간이 한참 걸렸다. 이런 경우 선관위는 분명히 차량 지원이 된다고 했는데 강서구청은 이 또한 모르고 있었다. 차량 오는 데만 40분이 걸렸는데, 비장애인이라면 5분이면 되는 것을 장애인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 투표하느라 2시간이나 걸렸다. 이런 현실에 더는 묵과할 수 없다.”
이어 박김 대표는 “유모차를 끌고 온 어머니는 아이를 낯선 사람에게 맡기고 혼자 내려가서 투표해야 했고, 노모랑 같이 온 딸은 노모를 두고 혼자 투표하고 오는 광경도 봤다. 이는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모든 사람의 문제임을 선관위가 인식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정책실장은 “이 나라에선 비장애인만 국민이고, 장애인은 국민이 아닌가.”라면서 “선관위는 투표소에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지 미리 전화해서 알아보라고 한다. 비장애인 중에 그러는 사람이 있는가? 왜 장애인은 미리 알아보고 골라서 가야 하나? 선관위는 이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분노했다
이날 이 실장은 선관위의 대책에 항의하며 휠체어에서 내려 투표소가 설치된 2층까지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이정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이 휠체어에서 내려 1층 바닥을 기어가고 있다.
삼청동 주민센터는 투표소가 2층에 있음에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2층 투표소로 가는 계단을 기어 올라가는 이정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또한 “나는 척수장애인이라 기어갈 수조차 없다. 2층 투표소에 올라가 투표하고 싶으니 선관위는 그에 따른 편의를 제공하라”며 1층 계단 아래에서 요구했다.
‘1층 임시기표소에서 투표하라’는 선관위의 거듭된 요구에 박 대표는 “나는 ‘임시적인 인간’이 아니다. 지금 국민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요청하고 있다.”면서 “경찰과 협조해서 휠체어째 2층에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선관위는 “휠체어째 들어 올릴 경우 사고가 생길 수 있다”며 안전을 이유로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선관위가 2시간이 넘도록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자 활동가들은 “두 시간이 넘도록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이 뭐하는 거냐”고 항의했다. 박 대표는 항의의 의미로 쇠사슬을 꺼내 현수막과 자신의 몸과 휠체어에 쇠사슬을 묶어 고정시켰다.
2시간 넘은 요구에도 선관위가 나타나지 않자 쇠사슬을 몸에 감고 항의하는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이날 투표하러 온 시민들은 편의시설이 없어 투표하지 못하는 장애인의 현실을 알고서는 “너무 한 것 아니냐. 어떻게 이런 것도 마련되지 않을 수 있느냐”고 선관위의 무책임한 행동을 질타했다.
선관위는 2시간 40여 분이 지난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선관위 측 관계자는 “죄송하다”고 허리를 숙였다. 남성 네 명이 박 대표를 휠체어째 들어 2층으로 옮겼다. 박 대표는 2시간 40여 분만에 2층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었다.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온 박 대표는 선관위 측 관계자에게 요구서를 전달하며 대선 투표 전날인 5월 8일에 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박 대표는 “개선하는데 무엇이 어려운지, 법 제정이 필요한지 등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정중한 항의도 함께 전달해달라”고 선관위 측에 밝혔다.
남성 네 명이 박경석 대표를 휠체어째 들어 투표소가 있는 2층으로 옮기고 있다.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온 박경석 대표가 중앙선관위 측 관계자에게 요구서를 전달하고 있다.
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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