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세상읽기] 차별이 저항이 되기까지

by 노들센터 posted Jun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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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23일 저녁 나는 노들장애인야학의 문을 두드렸다.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때였고, 경쟁으로 인해 매우 황폐해진 상태였다. 장애인의 ‘장’자도 몰랐지만 왠지 거기에 가면 좋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다. 스무살 남짓한 남자 교사가 나를 맞이했다. 야학에 대한 설명을 마친 그는 며칠 뒤에 집회가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지만 짐짓 태연한 척 물었다. “구호가 뭔가요?” “버스를 타자 입니다.” 나는 풉, 하고 웃었다. 뭔가에 대한 패러디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전혀 웃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챘다. 자세를 고쳐 앉아 물었다. “버스를 왜 타죠?” “장애인은 탈 수 없으니까요.” 나는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그럼… 지하철 타면 되잖아요.” 그는 가르쳐야 할 게 아주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구호를 들은 날이었다. 허공에 붕 뜬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누군가는 탈 수 없다는 그 버스를 타고서였다. 집회엔 가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 이상한 학교에 계속 갈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며칠 후 그날의 집회를 영상으로 보았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백명도 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쇠사슬로 서로의 몸과 휠체어를 묶어 8-1번 버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이동권을 보장하라!” 그들이 바깥에서 외치는 동안 버스 안에서는 휠체어를 탄 한 남자가 자신의 손목과 버스의 운전대에 수갑을 채우고선 버스가 움직일 수 없도록 막고 있었다. 기어이 버스를 함께 타겠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을 수백 명의 비장애인 경찰들이 체포하기 시작했다.

 

충격적이었고 몹시 가슴이 뛰었다. 그 순간 내가 장애인에 대해 가졌던 어떤 관념들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후 야학에 갔다가 영상 속에서 수갑을 차고 시위하던 그 장애인을 만났다. “노들야학 교장 박경석입니다.” 그의 두툼한 손이 내 손을 잡던 순간, 내 안에서 또 뭔가가 무너졌다. 휠체어를 탄 교장이라니, 불법 시위를 주도하는 교장이라니. 세계에 대한 이해가 급격히 바뀌는 나날이었다. 나는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다는 사람, 언니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신입 교사 교육을 받았다. 그때 내 손엔 장애인의 이동권 실태를 알려주는 자료집이 들려 있었지만, 정말로 나를 가르친 건 팔할이 우리가 동그랗게 둘러앉은 그 관계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해 겨울 임용시험이 있던 날, 시험장이 아니라 야학으로 갔다. 나는 그렇게 아무도 이기지 않은 채로 교사가 되었다.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들 옆에 서자 세계가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여서 나는 정말로 충격받았다. 내가 타고 온 버스도, 지하철도, 내가 다닌 학교도 모두 문제였다. 나는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건 경쟁하는 세계에서 연대하는 세계로, 적응하는 세계에서 저항하는 세계로, 냉소나 냉담보다는 희망을 더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공동체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가장 좋은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중력이 다른 세계에선 다른 근육과 다른 감각을 쓰면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노들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말했다. 차별이 사라져서 노들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말에 힘껏 저항하고 싶었다. 노들과 같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말할 때, 노들은 그저 차별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같은 구호는 수십년간 집 안에 갇혀 살아온 사람이 외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버스란 그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풍경의 일부일 뿐 자신이 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항하는 인간들이 ‘발명’해낸 말이다. 그 저항이란 해와 달의 질서에 맞서는 일처럼 아득한 것이지만 그 어려운 일을 기어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마지막에 누군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건 좋은 사회의 증거가 아니라 그 사회의 수명이 다했다는 징조인 것이다.

 

 

홍은전 ㅣ 작가·인권기록활동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8414.html#csidx3ada4dd694eccf084f57e46bbeea580 onebyone.gif?action_id=3ada4dd694eccf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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