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서울로 7017 위에서 / 홍은전

by 노들센터 posted Dec 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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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읽기] 서울로 7017 위에서 / 홍은전

 

홍은전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어느 날 나는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서울로 7017’ 위에 서 있었다. 노후화된 서울역 고가를 공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서울시는 5명의 ‘우수한’ 홈리스를 정원사로 취업시켰노라 광고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원에서 눕거나 구걸하는 행위를 금하고, 이 ‘우수하지 못한’ 홈리스들을 감시하는 청원경찰 16명을 두었다. 이런 이중성은 무척 서울스럽다. 나는 막 동자동 쪽방촌에서 나와 어안이 벙벙하던 참이었다. 가난한 그 동네가 서울역 근처인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근처일 줄은 또 몰랐다. 당연히 도시의 후미진 뒤편 어디쯤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곧바로 서울역의 얼굴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이었다.

 

‘동자동사랑방’과 ‘홈리스행동’이 만든 홈리스 생애 기록집 <생애조각을 모으다>를 읽었다. 죽은 사람들 18인에 대한 기록이었는데 고인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한 것이었다. 기록 작업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고인이 수년 동안 살았던 고시원의 총무는 고인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게 없었고, 제법 친했다던 지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 자기가 고아라고 했는데 죽고 난 뒤 보니까 가족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엄청난 것들이 태연하게 조합된 이런 이야기들. “그분이 한동안 안 보이다 나타났는데, 무료급식소 가던 길에 경찰 불심검문에 걸려서 한 달 동안 교도소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모은 조각이 고인의 생애를 구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며 자책했으나, 나는 생애의 조각조차 가난한 그것이 바로 가난의 생애인가 하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 도로도 깔고 아파트도 지었던 사람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를 잃었고, 일자리를 잃자 잠자리도 잃었다.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술에 의존한 채 거리와 쪽방, 수용시설 사이를 전전하는 그들에겐 죽음조차 일찍 닥쳐왔고, 가난한 가족이 시신 인수를 포기하면 위탁업체에 맡겨져 화장장으로 직행했다. 부고 없는 죽음. 어떤 이가 말했다. “친구라고 해봤자 절름발이에, 알코올 중독자이지만 우리의 추억이 그렇게 무시당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서울로 7017’ 위에서 서울역을 내려다보았다. 뒷덜미에 노을이 내려앉은 옛 서울역이 아름다웠다. 저곳은 최상근씨가 돌아가신 자리. 그는 늘 화단 옆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어느 아침, 광장의 물청소를 피해 지하철역 2번 출구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그날 오후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작은딸이 화단 한쪽에 술 한잔 부으며 울고 갔다 했다. 1997년 이맘때, 이제 막 서울에 도착한 나는 당시 대우빌딩이었던 서울스퀘어를 처음 보았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이 거대해서 울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거리에 흔한 노숙인과 그들을 투명인간처럼 대하던 ‘서울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 그 무심함조차 닮고 싶어 했던 20년 전 소녀가 떠오르자 문득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뒤를 돌면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촛불의 거리다. 해마다 300명이 넘는 홈리스와 1000명이 넘는 무연고자들이 외롭게 죽어가는 이 거리에서, 집 없는 이들에게 주거비를 지원하는 데엔 고작 26억을 쓰면서 이들을 추방해 격리하는 수용시설에는 237억의 예산을 쓰는 이 현실에서, 촛불은 어디까지 왔나. 다음주,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을 맞아 거리에서 죽어간 홈리스를 위한 추모 행사가 열린다. 다시, 촛불 하나 들어야겠다. 연대와 후원을 바란다. 하나은행 389-910001-18304(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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