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칼럼-홍은전] 시뻘게진 눈알 / 홍은전

by 노들센터 posted Dec 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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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시뻘게진 눈알 / 홍은

 

 

 

홍은전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박상호(가명)는 고아였다. 몇군데의 보육원을 거쳐 아홉살에 ‘선감학원’에 보내졌다. 추위와 배고픔, 구타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4년을 살다 선감학원이 폐쇄되던 80년에 나왔다. 보육원으로 보내진 소년은 도망치다 붙잡히길 반복했다. 네번째 도망에 성공해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자갈치시장에 갔던 소년은 ‘부랑아 선도’ 차량에 붙들렸다. 소년이 끌려간 곳은 형제복지원. 소년은 그곳에서 7년을 살다 시설이 폐쇄되던 87년에야 풀려났다. 소년의 나이 스무살이었다.

 

돈도 없었고 가족도 없었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고 허리도 온전치 않았다. 그는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 지갑을 털었다. 공장에서 일해본 적이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고아라는 사실도, 형제원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숨기며 살았다. 인생이 통째로 비밀이 된 그는 사람들의 뜻 없는 눈초리에도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껌이나 신문을 팔며 아리랑치기를 했고,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경남 합천에서 출소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박상호를 만났다. 인터뷰가 시작되기도 전에 ‘서울에선 절대 구할 수 없는’ 깨끗한 계란을 한가득 나에게 안길 만큼 그가 나를 반겼지만 인터뷰는 어쩐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구구절절이 설명하지도 않았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고아원-선감학원-형제복지원-교도소로 이어지는 그의 비극적 인생 조각들은 깨진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게 내 앞에 흩어져 있었으나, 이상하게 나는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았고, 다만 그 무감각이 극도로 불편했다. 파편들을 맞추어 전체 그림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래야 한껏 슬퍼하거나 분노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다음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전체 그림을 그리기엔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다. 두번째 만남에서 나는 그에게 이것저것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나 대화는 자꾸만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선감학원 다음에 보내졌던 보육원은 주말마다 미군들이 와 과자를 나눠주던 ‘천국’이라고 했는데 왜 자꾸 도망쳤느냐고 묻자, 그는 “바깥세상이 궁금해서”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선을 긋듯이 이렇게 말했다. “안 겪어본 사람들은 모릅니다.” 나는 조금 무안해져 이번에는 ‘지옥’ 같은 선감학원은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그는 입안에 쓴 것이 가득한 표정으로 “선감도를 빙 둘러싸고 산이고 바다”였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압니까.” 그의 눈빛이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 나는 은근한 반발심을 느꼈다.

 

마취된 것처럼 무직했던 감각이 별안간 되살아난 것은 <오두막>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였다. 그것은 박상호와 함께 십수년을 생활한 공동체의 대표가 쓴 것이었는데, 거기에 박상호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었다. “상호는 다음 끼니를 언제 먹을지 알 수 없었던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있어 자주 폭식을 했다. 또 수시로 박탈감과 무력감에 화가 나서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충동으로 이어지면 그걸 참아내느라 눈알이 시뻘게질 정도였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말하는 고통이었고, 긴 시간 일상을 공유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증언이었다. 나는 박상호의 인터뷰 녹취록을 읽고 또 읽었다. ‘시뻘게진 눈알’ 같은 건 어디에도 없고, 왜 모멸을 견디지 못했느냐고, 왜 ‘인간답게’ 죽음을 무릅쓰지 못했느냐고 들리는 그런 질문들만가득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8837.html#csidxb19f4f5df0e4e2daf37d7d9fc3a4c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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