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칼럼-홍은전] 선감도의 원혼들 / 홍은전

by 노들센터 posted Oct 2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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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1974년 열세 살의 이상민(가명)은 청량리역에서 신문팔이 생활을 했다. 어느 날 역전 파출소 경찰들이 마구잡이로 신문팔이 소년들을 잡아들이더니 서울 아동보호소로 보냈다. 집이 있다고 아우성쳐도 소용없었다. 6개월 후 소년들은 안산시 선감도에 있는 선감학원으로 보내졌다. 집에 보내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던 소년들에게 모진 매질이 가해졌다. 지옥 섬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한겨울에 바다에 들어가 굴을 캤고, 밤낮없이 뽕잎을 따다 누에를 먹였다. 어린아이가 오줌을 싸면 아이를 거꾸로 들어 맨바닥에 머리를 쳤고, 어떤 날은 과자를 준다며 아이들을 모아놓고 신나게 두들겨 팼다.

 

이상민과 같은 날 입소한 8명 중 2명이 얼마 안 가 죽었다. 한 명은 바다를 건너 도망치다 죽었고, 한 명은 저수지에서 시체로 떠올랐다. 소라와 낙지 같은 보드라운 것들은 죽은 소년의 몸에 붙어 눈구멍부터 파먹었다. 형편없이 망가진 시신들을 마을의 공동묘지 옆 맨땅에 관도 없이 묻었다. 개죽음이죠, 라고 이상민이 말했다. 그는 선감도에서 4년을 더 살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 찾아온 엄마를 따라 그곳을 빠져나왔다.

 

1942년에 설립돼 1982년에 폐쇄된 선감학원은 경기도가 직접 운영한 부랑아 수용소였다. ‘불량 행위’를 하는 자들을 교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빈민들을 추방하고 격리하기 위함이었다.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일을 하던 소년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감금되었다. 소년들의 머릿수는 공무원의 실적이 되었고, 도망친 소년들을 잡아 오는 주민에겐 밀가루가 주어졌다. 더러운 쥐의 꼬리를 잡듯이 모두가 혈안이 되어 남루한 꼬마들의 덜미를 잡던 시대였다. 무자비한 구타, 가혹행위, 성폭행, 살인, 강제노동이 자행되었고, 공포를 견딜 수 없던 소년들이 바다를 헤엄쳐 탈출했다. 탈출에 실패한 소년들은 죽을 만큼 맞거나 정말로 죽어서 암매장되었다. 선감도의 야산에는 300여구의 유골이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82년 폐쇄되어 조용히 잊힌 듯했던 선감학원의 실상은 어느 지역사학자에 의해 다시 알려졌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2016년 경기도의회는 진상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꾸렸고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았다. 내가 이상민을 만난 건 지난 2월이었다. 56세의 그는 선감학원 시절의 폭력으로 평생 허리와 다리의 고질적 통증을 안고 살았다. 대인기피증으로 평범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고 밤이면 술 없이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알고 지내던 선감학원 피해자 중 한 명은 쪽방에서 혼자 살다 자살했고, 한 명은 연안부두에서 술을 많이 먹고 죽은 채로 발견됐다. 자살일 거예요, 라고 이상민이 말했다.

 

선감학원은 경찰과 공무원이 빈민을 상대로 자행한 국가폭력이지만, 가해자인 경기도는 관련 서류가 남아 있지 않다며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상민은 보상 따위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반드시 그 서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잊고 싶었으나 잊을 수 없었던 처참한 기억을, 가해자가 그토록 쉽게 잊어선 안 되는 것이다. 1시간여 인터뷰도 힘들 만큼 그는 건강이 나빠 보였지만 다음날 새벽같이 일하러 가야 한다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카페를 나서던 그에게선 아직 덜 분해된 알코올과 이제 막 새로 붙인 3천 원짜리 파스 냄새가 뒤섞여 풍겨 나왔다. 그리고 어제, 그의 부음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간경화라고 했지만 내 귀엔 어쩐지, 자살일 거예요, 하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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