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칼럼-홍은전] 최옥란의 유서

by 노들센터 posted Mar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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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최옥란의 유서 / 홍은전

 

홍은전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3월26일은 장애해방 열사 최옥란의 기일이다. 추모제에서 낭독할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으며 그녀에 대한 자료들도 함께 건네받았다. 어린 시절의 사진과 유서가 들어 있었다. 앳된 얼굴에서 엿보이는 생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자필 유서의 무거움과 겹쳐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다. 2001년 3월26일, 최옥란은 유서를 썼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 준호에게. 돈을 많이 벌어서 너하고 같이 살고 싶었는데, 이번 생에는 그럴 수 없을 것 같구나. 너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멀리 떠난다. 한시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엄마가 어디에 있든 너를 끝까지 지켜주마.”

 

그날 그녀가 자살을 시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그녀는 그날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사망일은 2001년 3월26일이 아니라 2002년 3월26일이니까. 2001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 현장에서 그녀를 보았다. 경찰의 방패 앞에 가장 먼저 드러눕고 가장 마지막까지 버티던 못 말리는 싸움꾼. 그녀가 유서를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최옥란은 뇌성마비 장애 여성이다. 스물일곱에 아이를 낳았고 5년 후 이혼해, 아이를 빼앗긴 채 세상에 홀로 나왔다. 노점을 해 생계를 이어가다,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자가 되었다. 그녀가 받았던 생계비는 26만원. 월세와 약값을 내기에도 부족한 돈이었다. 다시 노점을 시작했지만 소득이 33만원을 넘으면 수급권을 박탈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애로 인해 의료보호가 절실했던 그녀는 수급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노점을 접었다. 돈을 모아 아이를 데려오겠다는 희망도 함께 사라졌다. 유서는 그때 쓰였을 것이다.

 

그 후 최옥란은 놀랍게도 목숨을 걸고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모욕과 수치의 대가 26만원을 반납하고,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고 한겨울 길바닥에서 노숙농성을 했다. 그녀는 썼다. “기초생활보장법이 나의 작은 꿈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이 제도가 정말로 나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살고 싶었으므로 죽을힘을 다했다. 그러나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양육권 소송을 위해 마련한 돈 700만원 때문에 또다시 수급권자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세상은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욱 빠져드는 늪 같았다. 그녀는 미뤄두었던 죽음을 택했다.

 

지난 3월22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제 폐지를 공약으로 발표했다. 이로써 모든 대선 후보들이 부양의무제 폐지를 약속했다. 이른 아침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꿈인가 싶게 얼떨떨했다. 박근혜가 검찰 포토라인에 서고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던 사이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이건 전부 꿈이야’라고 말했다 해도 나는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공약이 지켜진다면’ 송파 세 모녀와 같은 사각지대의 사람들 94만명이 새롭게 수급을 받게 되고, 6조8천억원의 예산이 더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일인 것이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광화문역에서 농성했던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이 이뤄낸 쾌거였다.

 

15년 전, 가난한 여성이고 장애인이며 노점상이었던 최옥란의 외로운 싸움으로부터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선 이 사회가 통째로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았던 사람. 계란 같은 몸으로 바위를 쳤던 사람. 그녀가 가슴에 품고 살았던 유서는 이렇게 끝난다. “내가 다하지 못한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오.” 그녀에게 큰 빚을 졌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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