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칼럼-홍은전] 어떤 세대

by 노들센터 posted Mar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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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어떤 세대

 



 

 

00503467_20170306.jpg   홍은전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아버지를 힘껏 밀어 쓰러뜨린 날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장애인야학 교사가 된 나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아버지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던 날, 어린 시절부터 억압되어 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솟구쳤다. 힘들게 살았다고 해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 것이 싫었다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 질렀다. 그길로 짐을 싸 집을 나왔다. 끔찍한 죄의식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아버지를 죽여야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는 말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태극기와 촛불이 힘겨루기를 하는 광장에 서면 그날의 아버지와 내가 겹쳐진다.

 

줄곧 아버지로부터 도망치듯 살아왔으나, 15년이 흐르는 동안 피할 수 없었던 진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뼛속까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다. 아, 이건 벗어날 수 없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였던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아버지도 그랬겠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어떤 운명을 견뎠겠구나.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가 당신의 운명과 싸운 최선의 결과물이겠구나.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몰랐던 것처럼. 아버지가 당신의 시대에 갇혀 살았듯, 나 역시 그랬다.

 

지난 2월 경남 진주에서는 한국전쟁 때 학살된 민간인의 유해를 발굴하는 일이 있었다.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는 그 산에만 무려 718구의 유해가 매장돼 있다는 걸 듣고 나는 몸서리를 쳤다. 1950년 7월 인민군이 이 지역으로 진격해 오기 직전의 어느 날, 군인들이 수백명의 사람들을 포승줄에 엮은 채 차에 태워 와 산속으로 끌고 갔다. 잠시 후 다닥다닥 총소리가 산을 울렸고, 고랑에선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이것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인데, 새삼스러울 것 없는 역사적 사실이 그토록 낯설고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책 속의 전쟁과 유년의 공간 위에 포개진 살육의 현장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있던 부랑아동 수용시설 ‘선감학원’의 피해 생존자 김경훈씨는 열세살 나이에 먹고살 길이 막막해 구두 통을 짊어지고 나갔다가 경찰에 붙들려 선감학원에 들어갔다. 모진 폭력을 견딜 수 없어 바다를 헤엄쳐 도망가려다 실패한 날 밤, 100여명의 원생들에게 ‘다구리’를 당했다고 이야기하던 그는 열세살의 소년처럼 훌쩍거렸다. 2년 만에 탈출에 성공해 열차에서 잡상인 생활을 했지만, 가난한 소년에게 세상은 여전히 난폭했다. 소년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이 잦아든 것은 공교롭게도 대전역 보일러실에서 ‘형님들’에게 죽을 만큼 두들겨 맞은 어느 날이었다. “돌멩이를 들었거든요.” 그 순간 그가 엷게 웃었다.

 

“돌멩이를 들었지.” 그 말을 할 땐 아버지도 꼭 웃었다. 보도연맹 사건이 있은 후 두 달쯤 지나 인민군이 퇴각할 때 마을의 청년들도 함께 사라졌는데, 그중엔 나의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경찰에 불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고 평생 골골했다. “싸움이 붙으면 상대는 형님도 데려오고 아버지도 데려오는데, 나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태어나보니 전쟁이었던 세대. 살기 위해 돌멩이를 들고, 살기 싫어 술을 들이부었던 사람들.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으며 돌멩이를 집어 드는 소년들을 생각하며 나는 이제부터라도 아버지의 인생을 정성껏 들어볼 생각이다. 군림했으므로 한 번도 공감받지 못했던 어떤 세대가 그들의 자식과 손자들이 함께 든 촛불 앞에 위태롭게 서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5346.html#csidxe5cbe6d4c93fa02bef68f65778b6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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