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을'들의 우정 - 우장창창과 노들 야학

by 이상우_아기예수 posted Jul 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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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을'들의 우정 - 우장창창과 노들야학

우장창창이 ‘장애우’를 이용해 먹는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2016년07월19일 13시15분

 

“우리는 하나의 모험적인 학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체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참여하고 창조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추측하고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 이 학교입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中


언젠가 읽었던 민중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이 문장은 교육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로 내 마음에 콕 박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우리가 학교라는 틀 속에서 받아왔던 모든 교육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각인시켜 줄 뿐이지 않았는가. 너의 부모님이, 선생님이, 미래의 상사와 사장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두려움에 떨게 했고, 그 두려운 존재로부터 질책당하지 않고 쫓겨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규칙과 조작된 지식을 습득하는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었다. 그 두려움의 무한경쟁으로 한껏 웅크러진 사람들이 옆에 있는 동료와 함께, ‘생각하고 참여하고 창조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추측하고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마침내 삶을 긍정하는 이 아름다운 여정을 누릴 수 있을까.


나는 대학시절을 포함해 16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학교교육을 받아오면서 프레이리가 말한 학교의 모습을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조금 멀리에서 만난 노들장애인야학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1993년 8월 8일, 광진구 아차산 중턱에 있는 정립회관의 탁구장을 빌려 시작된 노들야학은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차별’인 삶을 살아온 성인장애인들의 배움, 삶, 그리고 투쟁의 터전이다. 노들의 모험은 전동휠체어도, 활동보조인도 없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 모험은 방 안에 누워만 있던 학생을 야학 교실 책상 앞까지 이동시키기 위해 세상의 온갖 편견과 장벽에 부딪치는 일이었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는 리프트가 아니라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타고 안전하게 학교에 다니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노들은 장애인의 권리가 사회의 장벽에 가로막혀 멈춰 선 어느 곳에서라도 싸움을 주저하지 않는다. 차별에 맞선다는 것은 장애인을 둘러싼 이 사회의 진짜 모습과 대면하기 위한 성찰의 과정이었고, 그 끝에서 벌어진 투쟁은 그들에게 언제나 또 하나의 교실이 되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그들은 언제나 ‘생각하고 참여하고 창조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추측하고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웠다.


한편으로 노들의 실천은 그들만의 친구를 만드는 법이기도 했다. 노들에는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채 외딴 시설로 내몰린 경험을 가진 장애인들이 많다. 우리 사회가 소수자들에게 강요하는 이 ‘추방’의 경험을 가진 모든 이들과 노들은 친구가 되었다. 수십 년간 자신의 피와 땀이 어린 공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쌍용차 해고노동자, 한평생 일구며 살아온 농토를 갑자기 들이닥친 포클레인에 의해 파괴당한 두물머리 농부들, 손바닥 만한 쪽방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도시에서 ‘청소당하는’ 홈리스... 이들 모두가 노들이 거리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노들은 ‘거리의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지식보다 더 근원적인 삶에 대한 새로운 각성, 그리고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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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집행에 저항하는 맘상모 회원들 (사진 출처 : 맘상모)


추방의 경험


노들과 우장창창과의 만남도 그랬다. 오랫동안 노들야학 교사로 활동했던 임영희 씨는 어느 날부터인가 치킨집, 카페, 곱창집 등을 운영하는 사장님들과 맘상모(맘편히 장사하고 싶은 상인모임)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수년 간 열심히 장사했는데도 건물주의 소유권만을 지켜주는 법 때문에 그간 투자했던 시설비와 권리금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거리에 나앉게 될 처지에 놓인 상인들의 문제를 알리는데 동분서주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고,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도 일부 개정됐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신사동 가로수길에 위치한 곱창집 ‘우장창창’은 2010년 11월에 권리금 2억 7500만 원을 내고 가게를 오픈했다. 그리고 2년 후 건물주가 인기가수 ‘리쌍’으로 바뀌고, 리쌍은 자기들이 장사를 해야겠으니 우장창창은 나가라고 했다. 그게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고, 건물주의 권리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으나 그 말 한마디에 우장창창 사장 서윤수 씨는 엄청난 손해를 입어야 했다. 엄청난 권리금과 시설비를 날릴 위기에 처한 서 씨는 더 이상 그 근처에서 장사를 이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리쌍과 싸웠다. 그저, 계속 장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리쌍과 우장창창의 수년에 걸친 분쟁은 복잡한 법적 문제가 얽힌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가 진짜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따지기 위해 ‘법’에 의거한 ‘상식’을 들먹였다. 그래서 ‘계속 장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서 씨의 생존의 절박함은 사람들의 논의 속에서 열외가 되었고, 서 씨는 마침내 유명 연예인을 상대로 ‘을질’을 하는 가해자로 공격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노들은 법은 절대 말해주지 않는 자영업자 서윤수 씨의 절박한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것은 어쩌면 법 이전의 정의, 법 이전의 정서의 문제였다. 건물주의 소유권을 다른 사회적 권리를 압도하는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법은 어쩌면, 그 절규의 목소리를 촘촘히 틀어막기 위해 설계된 첨단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법을 가로질러야만 했다. 그것이 ‘추방’의 경험을 갖고 있는 장애인이 바로 지금 이곳에서 ‘추방’을 겪고 있는 이들을 향해 자신만의 우정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그 우정과 연대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을 만들어가는, 노들야학만이 가진 고유한 ‘교육적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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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창창 강제집행에 반대하는 노들장애인야학 학생들 (사진출처 : 노들장애인야학 페이스북)

가장 이상적인 친구 관계


지난 일주일간 노들장애인야학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온갖 악성 댓글들이 달렸다. 노들야학의 성인장애인 학생들이 우장창창을 응원하기 위해 ‘리쌍-우장창창, 우리 지금 만나!’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인증샷을 여러 장 올린 게 화근이었다. 비슷한 댓글들은 인증샷을 퍼간 클리앙, MLB PARK, 오늘의유머, 일간베스트 등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물에도 넘쳐났다.


- “장애우 이용하는거봐 진짜 토나온다 역겨워요”
- “이거보니 확실해졌네요. 감성팔이하고 있다는게. 선을 넘었어요.”
- “저분들이 상황을 제대로 아시고 저 문구를 들고 계시는지부터가 의문임. 내가 보기엔 그냥 착한이미지로 보이려고 언플하는걸로만 보이는데 ㅋㅋㅋㅋ 저분들 종이에 리쌍화이팅! 적고 드려도 그대로 사진 찍으실껄요?”


‘장애우’가 자신의 문제와 관련 없(어 보이)는 일에 나서는 것은 누군가의 언론플레이에 이용당하는 것이라는 생각, 즉 ‘장애우’는 이런 사안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저런 행동을 했을 리 없다는 지독한 편견이 댓글들에 뚝뚝 흘러 넘쳤다. 그렇게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을 줄곧 ‘장애우(友)’라 불렀다.


갑자기, 역으로 이렇게 묻고 싶어졌다. 저 댓글을 단 분들은 ‘친구’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친구’라고 부른 이가 힘없고 무능하고 사고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것이라 여기고 그저 가엽게 여길 때, 그들을 진정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친구’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수준 높은 관계의 형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영복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입장의 동일함’으로 표현된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라고 선생은 말씀하셨다.


감히 말하건대, 우장창창과 노들야학, 그들의 관계는 ‘입장의 동일함’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이상적인 친구라 말하고 싶다. 돈과 건물, 땅을 가진 자들의 권리만을 인정하는 이 사회에 맞선, 추방당한 자들의 연대와 우정, 그리고 입장의 동일함. 이 고차원적인 친구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감히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말기를. 그리고 이 불온한 우정이 우리 사회에 더 널리 퍼지기를, 그리하여 이 땅의 추방당한 모든 이들이 함께 ‘생각하고 참여하고 창조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추측하고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삶을 긍정’하기를!
 

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 이 글은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이 펴내는 <함께하는 품> 24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기사출처 : 비마이너 http://www.beminor.com/detail.php?number=9911&thread=03r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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